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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45분. 출근을 준비하기 위해 늘 일어나던 시간, 휴가 기간에도 어김없이 그 시간에 눈을 떴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어느새 내 머릿속은 알람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5시 45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 지금은 1년에 딱 한번뿐인 금쪽 같은 휴가 기간이다. 

휴가 콘셉트는 '무계획'과 '혼자만의 시간'

평일엔 회사, 주말엔 평일에 못 놀았던 것을 한꺼번에 노느라 정신없었던 내 삶에 이번 휴가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

눈 뜨자마자 생각나는 카페를 오늘의 '비벼댈 장소'로 잡고, 한낮의 태양이 기승을 부리기 전에 책 한 권, 그리고 노트와 펜을 넣은 가방을 메고, 맨 얼굴에 슬리퍼 차림으로 일단 에어컨 없는 집에서 뛰쳐나간다.

한낮의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찬바람 슝슝 나오는 카페에서 책 읽고, 글 쓰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다. 저녁 바람이 좋아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의 보물상자(500기가 외장하드를 꽉 채운 영화들)를 열어 영화 한 편을 보면 오늘 하루는 끝. 운동 부족이다 싶으면 지하철을 타고 딴 동네 카페도 가보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휴가의 반나절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바다가 보이는 곳
▲ 강릉 바다가 보이는 곳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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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오늘도 5시 45분. 휴가가 며칠 남지 않은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카페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 1호 바리스타 할아버지(박이추 선생님)가 20년째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 맛이 일품이라는 친구의 정보로 알게 된 그곳을 오늘의 '비벼댈 장소'로 정하고 얼른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 커피 마시러 강릉 가.
- 너무 럭셔리 한 거 아니야? 나도 스파게티 먹으러 이태리 가고 싶다.

등의 문자를 노닥거리며, 오늘도 나와는 인연이 없는 고장 난 mp3는 다시 가방 안으로. 차창을 바라보다 잠이 들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강릉, 그곳에서도 조금 더 들어간 주문진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거리여서, 택시를 잡아 타고 <보헤미안> 커피하우스로 향했다.

왠지 '미안'이라는 글자가 더 크게 보였던, 화요일은 보헤미안 쉬는 날
▲ 보헤미안 왠지 '미안'이라는 글자가 더 크게 보였던, 화요일은 보헤미안 쉬는 날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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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 시간 반을 할애하며 찾아간 보헤미안은 오늘 휴업이었다(매주 월, 화 쉬는 날임. 필히 확인하시라).

보헤미안의 팻말에서 나는 자꾸만 '보헤미안, 미안, 미안'이라는 글자만 눈에 보였다. 커피만 생각하고 왔던 나는 잠시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일단 문 닫힌 카페 계단에 앉아 다행히 동서울터미널을 빠져나오기 전에 사놓았던 캔커피를 꺼내 마셨다. 그리고 수첩 한 장을 북 찢어 1호 바리스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3시간 만에 찾아간 카페 앞에서 캔커피를 마시다
▲ 문닫힌 카페 3시간 만에 찾아간 카페 앞에서 캔커피를 마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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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시러 서울에서 왔는데, 오늘 휴업이라니
정말 저에게 보헤미안 하셔야겠어요 ㅠㅠ
다음에 또 올게요. 제 이름은 박진희박이니, 기억해두셨다가
제가 오면 커피값에서 고속버스비 빼주시기를 부탁드려요 ㅋㅋ

근처엔 펜션 하나와 논밭밖에 없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어찌 해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멀리 보이는 바닷가까지 마을길을 통해 걸어가 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전라남도 땅끝으로 안내해 주던 2번국도, 화진포로 향하던 6번국도, 그리고 제주 올레, 그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걷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좋은 사람, 좋은 길, 좋은 여행, 좋은 배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다시 주문진으로 들어가는 그 시간들도 모두 이 좋은 것들이 함께 만들어준 것이다.

물을 사러 들어간 슈퍼마켓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경관을 볼 수 있는지 설명해 주던 주인 아저씨부터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며 말동무가 되어주던 주민들, 갑자기 쏟아지는 빗길에 우산을 씌워주시던 아주머니...

커피는 못마시고 강릉을 걷다
▲ 급작스러운 도보여행 커피는 못마시고 강릉을 걷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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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따뜻하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구나.

비록 보헤미안의 휴업으로 나는 그 근사한 커피는 마시지 못했지만, 주문진터미널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어느새 그 휴업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길에서 주운 생각들, 길에서 다시 다짐하게 된 내 꿈들. 그 귀한 시간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시, 빠른 시일 내 누군가에게 또 이런 문자를 넣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커피 마시러 강릉 가고 있어"라고.

휴가철 바닷가, 가장 조용한 곳은 낚시터 방파제
▲ 바다낚시 휴가철 바닷가, 가장 조용한 곳은 낚시터 방파제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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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특별한 카페놀이
목동아이스링크장 이건 좀 편법이긴 한데, 입장권 4천원 끊어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커피 마시거나 책 읽거나 수다 떨면 딱 좋은 곳! 여름에 한겨울을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카페가 된다.
한밤의 선유도 공원 서울의 야경이 이리도 예뻤던가. 한강을 보며, 또 저녁에 선유도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공짜 공연들을 즐기며 커피 또는 맥주 마시기 좋은 곳!


태그:#니콜키드박, #이번엔, #강릉, #커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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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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