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땡볕 후유증'으로 이틀을 쉬고 사흘 만에 여정을 재개했습니다. 늘 썰렁해 뵈던 술정리 창녕상설시장은 7일장을 맞아 인파로 북적입니다. 흑백사진 속 시골마을이 색채를 되찾은 듯 보입니다.

7일장을 맞은 술정리 창녕상설시장에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다.
 7일장을 맞은 술정리 창녕상설시장에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마음에 다시 여유가 생기니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오늘이란 시간 사이로 천 년도 넘는 세월의 강이 촉촉히 흐르고 있습니다. 시장 구경을 하던 중에 샛길 그 끝에 돌탑 머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천년도 넘는 세월을 살아낸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천년도 넘는 세월을 살아낸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심상치 않은 기운에 다가가 보니 통일신라 때 세운 '동삼층석탑'입니다. 1965년에 해체·수리 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든 용기가 발견됐다는데 탑은 마치 백 년을 살고도 아이의 눈을 지닌 과묵한 노인 같습니다. 실은 그보다 열 배도 넘는 시간을 살아낸 거지요.

시장에서 나와 큰길로 접어드니 또다른 이정표가 발길을 잡습니다. 창녕경찰서 지나 만옥정 공원에 들어서자 완벽한 시간여행이 시작됩니다. 입구 왼편에 300~4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유래 모를 객사가 있고 그 옆에 앞서 동삼층석탑과 같은 시대서 온 '퇴천 3층석탑'이 섰습니다. 탑 뒤로는 500여 년 터울을 둔 이 지방 관료들의 선정비가 검버섯 핀 얼굴로 서 있습니다.

그늘에 잠시 섰다 잔디밭 사잇길을 따라걸으니 이번엔 정확히 139년 전에 만들어진 '척화비'가 있습니다. 후광을 받은 비석 전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란 뜻의 한자가 고집스레 각인돼 있습니다. 이어서 공원의 가장 안쪽 낮은 언덕 좌측에는 UN전적비가 있고 그 우측에 진흥왕 척경비가 희미한 얼굴로 주변을 내려다봅니다.

고종 8년에 외국과의 화친을 경계하며 나라에서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고종 8년에 외국과의 화친을 경계하며 나라에서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척경비 옆에서 마을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그 옛날 이곳에 거주하며 풍경을 채우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요?

마을 구경을 끝내고 우포늪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자전거는 터미널 나무의자에 열쇠를 채워 묶어 두었습니다. 체력 소모를 줄이려 지금까지보다 대중교통 이용을 늘일 생각입니다. 자전거로 갔음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길을 차가 반 시간도 안 돼 데려다 줍니다.

우포늪을 둘러보기 앞서 생태체험관에 들러 이곳 사는 생명들과 자연의 습성을 공부했습니다. 입장료가 성인 기준 2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싶었지만 제대로만 본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눈에도 넓어 뵈는 우포늪은 그 면적이 축구장 크기(10800㎡)의 2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안팎에서 생장하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들에게서 원시의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생태관에서 배운 바로는 늪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한 생물다양성을 지니며, 잘 발달된 그것은 홍수조절에 큰 기여를 한답니다. 큰 비가 오면 스펀지처럼 수분을 머금었다 천천히 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지하수의 수위 유지와 수질정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생명력 가득한 우포늪
 생명력 가득한 우포늪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늪 둘레를 따라서 천천히 걷다보니 사진으로 봤던 낯익은 생명들이 보입니다. 뺨이 하얀 흰뺨오리 가족도 있고, 여름철새 쇠백로와 왜가리도 보이고 멸종위기식물인 가시연도 보랏빛 어여쁜 꽃을 물 위로 빼꼼 내밀고 있습니다. 이름을 알고 있으니 괜스레 더 반갑습니다.

(시계방향으로) 우포늪에 사는 흰뺨오리, 쇠백로, 왜가리, 가시연
 (시계방향으로) 우포늪에 사는 흰뺨오리, 쇠백로, 왜가리, 가시연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강바닥을 뒤집어 그 내용물을 무덤처럼 쌓아둔 함안의 '4대강 사업' 현장이 생각났습니다. 본디 자연은 사람을 비롯한 그 품에 안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무지한 인간들이 제멋대로 살생을 저지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생명만이 귀한 게 아니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왜 모를까요?

우포늪을 끝으로 창녕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제법 먼 길을 달려 왔습니다. 마산에서 진주로 다시 하동으로 차를 세 번 갈아타고 세 시간 넘게 이동했습니다. 섬진강변에 도착했을 때는 강물 위로 서서히 노을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섬진강 옆 송림공원.
 섬진강 옆 송림공원.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이날 생을 다한 송림공원 186번 소나무
 이날 생을 다한 송림공원 186번 소나무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강을 따라 넓은 소나무숲이 울창한 송림공원에서 잠시 산림욕을 했습니다. 코끝에서 머릿속까지 청량감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 소나무 한 그루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보호수 186번. 목격자들에 따르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윗동이 갈라진 나무는 주변의 '동료수'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쓰러졌다 합니다. 신기해 하는 사람들 곁에서 목소리 좋은 노인 한 분이 "나무도 생명이 있어 주변의 것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했습니다. 듣고보니 수미터 나무가 1미터 남짓 떨어진 주변 나무들 사이로 얌전히 누운 것이 신기했습니다.

하동에 도착한 지 얼마지 않아 사위가 어둑해졌습니다. 근처 작은 식당에서 부추 가득 썰어넣은 시원한 재첩국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숙소를 구했습니다. 조금 전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릴 적 외가에서 본 하늘과 꼭 같이 흰 별이 가득했습니다. 시골의 추억이 없는 도시 아이들은 이런 찬란한 하늘을 상상이나 할까요.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눈꺼풀이 무거우니 이만 줄입니다.

(추신 : 이날(지난 8일) 이후 태풍 '뎬무'와 전국에 이어진 국지성 폭우로 인해 여정을 잠시 중단했습니다. 지금은 편안한 곳에 머물며 다시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그:#국내여행, #공정여행, #통일신라, #송림공원, #섬진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