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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를 거부하다 해임된 교사를 위해 초등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선생님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학생들은 학교측에 피켓을 빼았겼지만 국가인권위는 이 학교 교장에게 학생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재발방지를 권고했다. 초등학생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피켓을 드는 시대. 뿐만 아니라 팬클럽, 스포츠 응원단 등에게 피켓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2010 피켓문화' 1탄에서는 대중문화 속에서 '플카', '치어플'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피켓의 모습을, 2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피켓의 변천사를 살펴보겠다. [편집자말]
전국 중학교 1,2학년 대상으로 일제고사가 실시된 2008년 12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일제고사 반대 집회에서 학생들이 일제고사 반대, 해직교사들의 부당한 징계 철회, 공정택 교육감 퇴진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 중학교 1,2학년 대상으로 일제고사가 실시된 2008년 12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일제고사 반대 집회에서 학생들이 일제고사 반대, 해직교사들의 부당한 징계 철회, 공정택 교육감 퇴진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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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치적·사회적 목소리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인 피켓. 과거 집회 현장에서 '철폐하라', '각성하라' 등 딱딱한 구호로 무장했던 피켓이 '웃음'을 덧칠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재미있는 피켓', '웃음을 유발하는 피켓'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무엇이 과거의 엄숙했던 피켓에 웃음을 주었나. 다시 말해 피켓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그 흔적을 되짚어 보자.

[1987년~1990년대] 쇠파이프 대체용으로 등장한 4·4·4·4피켓

1980년대 민주화 투쟁시기.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경찰들과 대치하는 시간들이 더 길었던 그 시절, 많은 대학생들은 직접 '투쟁의 전선'에 나섰다. 90년대 초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1991년의 '5월 투쟁'을 비롯해 90년대 초반에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이 때를 "쇠파이프 들기도 바빴던 때"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90년대 초중반을 넘기면서 시위학생들의 손에는 '쇠파이프' 대신 '피켓'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피켓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말 '우루과이 라운드'를 반대하는 집회에서부터라는 의견이 많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골자인 '농산물 개방'에 반대하는 많은 농민들과 학생들이 연대해 거리로 나서면서 피켓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전명윤(38)씨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운동 때 일반 시민들에게 '신토불이' 등 정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구호와 피켓이 필요했다"며 "내 기억으로는 그 즈음부터 피켓이 널리 쓰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은 종이 박스를 잘라 흰 종이를 씌우고 검정, 빨강, 파랑 매직으로 문구를 써서 피켓을 만들었다. 피켓에 쓰여지는 문구는 구호로 외치기 쉬운 앞 뒤 4·4·4·4글자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소규모의 집회나 기자회견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피켓은 집회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필수 아이템이 됐다.

[2008년] 촛불집회를 휩쓴 '다품종 소량생산' 일침 피켓

지난 2008년, 안양 범계역에서 춧불모자를 쓴 촛불소녀
 지난 2008년, 안양 범계역에서 춧불모자를 쓴 촛불소녀
ⓒ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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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리콜이 되나요?"
"문열어, 개념이야."
"미친소 먹고 민영의료보험으로 돈 없어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다오."

2008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들고 나온 피켓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물론 당시에 시민단체 등에서 나누어 준 피켓들도 많았지만,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제각기 자신의 개성이 담긴 피켓을 '자체' 제작했다. '소품종 대량생산'된 피켓이 아닌, '다품종 소량생산'된 피켓들이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피켓에 쓰이는 문구도 이전과 뚜렷하게 달라졌다. 4·4·4·4의 '구호'형 문장 대신 일반적 대화체 등의 문장이 주를 이뤘다. 재료도 다양해져, 나무에 흰 천이나 종이를 대던 것에서 벗어나 색색의 종이로 만들어진 피켓이 등장했다. 컴퓨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세대인 만큼 '이미지 합성' 등을 통해 A4 종이로 출력된 피켓도 나타났다.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나름의 해학이 담겨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던 피켓들은 언론 및 인터넷 등을 통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당시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서영(25)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누리꾼들이 피켓을 배포하기도 했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문구를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해 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또 "피켓의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줬다"며 "집회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이런 피켓들을 보며 한 번씩 웃고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피켓이 있으면 사람들이 행진하면서도 한 번씩은 다 쳐다보고 갔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피켓이 촛불집회를 장시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2010년] 지치지 않기 위해 '재미있는' 피켓 만드는 사람들

재미있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여대생들.
▲ 우리 안전하게, 평화롭게 시위해요 재미있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여대생들.
ⓒ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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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저녁 서울 정동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앞.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가 한창이었다. '2010 대학생 시대여행'이라는 깃발 아래,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저마다 "자연은 함부로 훼손하는 거 아니야~", "MB 넌 집행유예야"처럼 유행어나 개그 프로그램 등을 패러디한 문구들이 담긴 피켓을 든 채였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널리 퍼진 '합성용 짤방'이 사용된 피켓도 찾아볼 수 있었다.

2010 대학생 시대여행단 단원 김미란(20)씨는 "유머러스하고 익숙한 내용이나 표현이 담긴 피켓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쉽다"며 "옛날보다는 정치를 대하는 방식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나. (정부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진 않으니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효율적인 홍보를 위한 것"이라는 김씨의 말에 또다른 단원인 박아무개(22)씨는 "행동의 지속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박씨는 "집회나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 지치지 않고 웃음을 유발하게 되면 (운동의) 지속성이 높아지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문화제의 사회를 본 양홍관 민주노동당 환경위원장은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 '운동'과 지금 '운동'의 차이가 "생기발랄"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기성세대)가 어둡고 고난스러웠다면 이 친구들은 기쁨, 희망, 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로 즐길 줄 아는 각성한 시민들, 젊은 세대

지난 11일 서울 정동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앞에서 열린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2010 대학생 시대여행단원들이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참석하였다.
▲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대학생들 지난 11일 서울 정동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앞에서 열린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2010 대학생 시대여행단원들이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참석하였다.
ⓒ 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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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에 대해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나름대로 재미 혹은 놀이의 형태로 바꾸는 젊은 세대의 특징"이라며 "시위조차 놀이로 보는 젊은이들의 문화는 엄숙주의에 빠졌던 기성세대들은 가질 수 없는 감각"이라고 평가했다. 또 김 교수는 "전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같은 경직성이 완화되면서 민주화 세대의 새로운 소통방식이 가져온 변화라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과거 민주화를 이루어냈던 원동력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항거였다. 목숨을 걸고 권력에 맞서야 했던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피켓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히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 간결하고 날이 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투쟁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새로운 세대들은 새로운 모습으로의 집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터넷 문화와 개그 코드가 적절히 결합된 새로운 피켓의 등장이 그 단적인 예다. 물론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피켓 문구가 인터넷 문화와 깊숙이 맞닿아있다 보니, 과도한 인터넷 용어의 사용이 자칫하면 한글 파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로 하여금 '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하는 피켓들은 집회를 단순히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시민 모두의 리그"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다. 새로운 세대들이 열어갈 세상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내면화한, '뻔뻔(funfun)한' 이들이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 이미나·강민수 기자는 오마이뉴스 12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피켓, #촛불,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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