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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아침 복개천으로 나갔으나 상근이는 없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복개천으로 나갔으나 상근이는 없었습니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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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 복개천 어딘가에 개 한 마리가 묶여 방치되어 있다는 제보를 들었다. 일명 '상근이'. 상근이는 한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그레이트 피레니즈 종 개의 이름이다. 현존하는 개의 종 중 가장 큰 종으로 알려져 있어 우리나라처럼 공동주택이 많은 곳에서는 기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상근이의 인기로 한때 유행처럼 기르기가 번지기도 했다. 상근이의 등장 이후 2년 사이. 나는 곳곳에서 갈 곳 없는 상근이를 발견했다. 몸집이 커지며 감당할 수 없게 된 상근이들은 길거리로, 무책임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또 개고기집으로 넘겨졌다.

거리에서 개고기시장서 넘쳐나는 '상근이'들

복개천에 묶여 있다고 해서 어느새 그 개의 이름은 '묶여있는 상근이'가 되었다. 주인이 있다는데... 돌봐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데... 일파만파 소문만 무성해지고 있을 때. 더위에 짧은 줄에 묶여 있는 상근이가 안쓰럽다며 매일 밥을 주고 있다는 한 제보자의 전화를 받고 복개천을 다녀왔다. 그러나 개는 없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상근이처럼 방치된 개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딱히 데려온다 해도 보호할 공간조차 없었다. 그러나 "밥을 주고 돌아서는데 가지 말라고 컹컹 짖더라구요..." 제보자의 이 말 한마디에 전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뜨거운 한낮에 현장을 갔다. 묶여있는 상근이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무료함과 밥 주고 돌아서 간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공포.

동물행동학자 템플 그랜딘의 말에 의하면 동물의 공포는 인간의 공포보다 잔혹하다. 인간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나 동물은 나쁜 기억을 지워내지 못한다고 한다. 언어로 감정을 조절하고 추상화할 수 있는 인간과 달리 동물에게 모든 상황은 그림처럼 다가온다. 공포스러운 상황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견뎌내지 못한 채 동물들은 그 공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주인이 자신을 외딴 곳에 방치하고 돌아오지 않았을 때 받은 상처는 영원히 상근이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더위와 기다림에 지쳐가는 상근이를 데리고 올 수도 없고, 주인도 만날 수도 없었고, 하루종일 허탕치고 돌아온 오후. 몸도 마음도 지쳤다. 10건의 제보가 들어온다 한들 한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하기가 어렵다. 나는 동물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도 영웅도 슈퍼맨도 신도 아니다. 평범한 한 인간으로 인간이 이백년 이상 조직적으로 이용하고 즐기고 학대하고 방치한 동물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얼마나 무능한가. 무능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무능하고도 유일한 해결책. 책장에서 책 하나 꺼내 읽어 내려가는 것... 그러다 우연히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을 읽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광장에 나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답을 하는 것보다 올바른 질문을 제대로 던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변명할 수 있었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보다 양심과 진리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묶여 있는 상근이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은 재래시장만 가면 발견하는 그레이트 피레니즈 종 때문이었다. 5월에서 8월 사이 늘 재래시장에 발견하게 되는 그레이트 피레니즈 종. 왜 피레니즈는 이 개고기 시장 한가운데 있는가? 개를 근수로 계산하는 그 업자의 애완견이라고 보기에 그 개는 덩치도 크고 사육비용도 만만치 않게 나갈 것으로 보였다. 개를 죽여 칼질하고 그 고기를 파는 주인이 그 큰 개를 사랑하며 키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완견과 식용견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바람일 뿐이다.

한 재래시장에서 발견한 그레이트 피레니즈. 대형견이고 관리가 어려워 쉽게 버려진다.
 한 재래시장에서 발견한 그레이트 피레니즈. 대형견이고 관리가 어려워 쉽게 버려진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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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서 발견한 그레이트 피레니즈 두 마리. 개를 근수대로 사고 파는 개고기시장에서 간혹 발견된다.
 재래시장에서 발견한 그레이트 피레니즈 두 마리. 개를 근수대로 사고 파는 개고기시장에서 간혹 발견된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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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개식용문화 과연 괜찮은가요?

소피스트들이 진리의 상대성을 말할 때 소크라테스는 절대적 진리와 절대선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개를 먹는 것이 문화이며 문화적 상대성에 따라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개를 먹고 있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다.

절대적인 진리와 선이 있다면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취향과 문화의 문제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분명히 행복감이다. 그러나 내 입맛을 맞추기 위한 행복보다 더 가치 있는 행복이 있지 않을까. 2000년의 시간을 넘어 21세기 개를 먹는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일명 통개.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크기는 다양하다.
 일명 통개.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크기는 다양하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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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취향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불편한 행위이다. 소수민족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파괴해온 강자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비난받지 않기 위해 남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편한 삶이다. 나 역시 개와 함께 생활해 왔으면서도 이 문제에 오랜 기간 침묵했다. 불편한 진실을 꺼내놓고 누군가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고 싶지 않은 그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과정을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앎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불편함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필요하다. 왜 인간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가, 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되는가 라는 우리시대의 진리는 이런 질문을 통해 첫걸음을 떼지 않았는가.

우두머리를 섬기고 집단 내 서열의식이 엄격한 늑대의 후손 개. 인간을 섬기며 충성을 바치는 습성으로 인간은 개를 가까이 했다. 그러나 위협을 느낄 때 어김없이 드러나는 공격성. 이 공격성을 잠재우기 위해 개를 사육하고 운송하고 도살하는 모든 과정에서 잔혹한 학대가 이루어진다.

개식용이 산업화될수록 이 학대는 더욱 심해진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좁은 공간에서 더욱 많은 개를 키우고,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많은 개를 운송하고 공격하고 싸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좁은 케이지에 몸을 구겨 넣는다. 몸이 구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죽어 근수대로 팔려갈 고깃덩어리 아닌가.

식육해체작업은 동료 개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식육해체작업은 동료 개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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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운반된 개들은 철창에 전시되어 손님을 기다린다. 손님이 개를 고르고 흥정이 끝나면 업주는 바로 개를 끌고 전기도살기구로 기절시키고 털을 뽑고 불에 그슬린다. 이 과정은 손님도 볼 수 있고 다른 가축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벌어진다.

지난 봄 바로 몇 초 전 만 원을 깎으려고 흥정하던 손님이 자신이 고른 개가 제 눈앞에서 도살되는 것을 보며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바로 당신이 저 개를 샀기 때문에 저 개는 죽었다", 이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인간의 잔인함이 문제가 아니다. 놀라운 자기합리화. 혀를 끌끌 차던 그 사람은 식육해체작업을 보겠다고 업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개를 고르면 바로 도살된다.
 손님이 개를 고르면 바로 도살된다.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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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하게 인도적인 도살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고자 하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문명화와 문화발달에 따라 도살장이 인간의 삶에서 동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이유만으로도 육식문화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태도를 발견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동물을 도살하는 데 죄책감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럼 돼지를 도살장에서 죽이는 것은 괜찮다는 것인가. 개를 도살장에서 죽이면 되는가? 사형제도를 논함에 있어 사형수의 죄질을 논하는 것은 논의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핵심은 국가와 제도가 부여한 죽음이다. 사형을 합법적 살인이라고 했던가. 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곳에서 죽이는 행위는 살생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문명화된 행위이다. 그 행위의 비판 자체가 합법적 도살장의 합리화는 아니다. 살인이 비도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살인자의 사형이 본질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는 수많은 동물의 죽음을 목격했다. 재래시장에서 농장에서 그리고 소의 도살장에서. 거대한 몸집의 소가 뇌에 기절총을 맞고 쓰러지자 경동맥을 날리는 칼질에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가 인도적이라고 합법적으로 인정한 죽음에서 나는 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도살장을 목격한 이후 채식주의자가 된 톨스토이처럼. 내가 소를 먹지 않는 것은 나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야 소들이 보다 적게 죽을 것이며 보다 인도적인 죽음에 대해 연구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개의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개의 행동학적 특성은 식용산업의 대열에 넣기에 적합하지 않다. 동물은 인간의 중요한 식재료이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몰랐던 18세기라면 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과 동물학 생태학의 발전은 동물의 고통과 인식 체계까지 밝혀냈다. 이것이 21세기에 우리가 식재료로 삼는 동물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고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이유이다.

복날, 누군가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더위를 참아냈습니다

오늘은 복날이다. 더위를 슬기롭게 이겨내려는 조상의 지혜가 어느 사이 식도락과 보양식만을 즐기는 이상한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어찌되었든 동물성 단백질을 먹지 않음으로써 나는 행복하다. 우리 땅에서 난 우리 농산물을 먹으며 부채로 땀도 식히며. 우리 농부들의 땀과 맛있는 과일을 생산해준 땅의 기운에 감사한다. 누군가의 피를 흘리지 않고 더위를 참아낸 내 행위가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더위는 피할 수 없다. 그냥 참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 알곡은 날마다 익어가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한 달만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 것이고 가을이 될 것이고 더운 여름 성근 알곡을 수확해 우리의 곡창을 채울 것이다. 계절에 나는 음식을 갖춰 먹으며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진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보양식에 집착하는가. 1kg에 만 오천원~이만원.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굶주림의 대안품이 아니다. 때가 되면 습관처럼 먹는 것 누군가 먹으니 먹는 것, 우리 조상이 이백년 동안 개를 먹어왔던. 천년을 먹어왔던. 영원무궁한 문화가 없듯이 한번쯤은 우리가 가진 식습관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묶여있던 상근이는 누군가의 신고로 보호소로 갔다가 하루만에 주인이 찾아갔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 또 묶여 있을까. 사람들은 내가 동물을 돕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은 나에게 삶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도록 도와주었다. 현재 우리 인간은 동물과 옳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태그:#개식용산업, #복날, #개고기, #동물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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