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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궁궐사건>겉그림
 <조선궁궐사건>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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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에 고종황제는 1907년 6월,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특파한다. 일제 침략의 실상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열강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한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어 퇴위시킨다. 그런 후 이토 히로부미와 외상 하야시 다다스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한 신협약을 작성, 1907년 7월 24일 정식으로 대한제국에 요구한다. 이것이 정미 7조약,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마지막 조치였다.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②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④ 한국 고등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용빙할 것, ⑥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 포털사이트 백과사전 참고

정미 7조약은, 7항목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대한제국의 입법, 사법, 행정부를 비롯하여 황제의 권한까지 일본이 모두 통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요구를 이완용 내각이 찬성, 순종을 압박하여 하루 만에 재가를 얻어냄으로써 사실상 대한제국을 팔아넘긴 조약이다. '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정미 7조약에는 가장 중요한 군사권이 빠져 있다. 이는 군사권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지라 반발을 의식, 비밀각서의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의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 다수가 의병에 편입,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경술국치 100년 맞아 펼친 <조선궁궐사건>, 남다르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에 조선식민지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자 만주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절명한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몇 차례의 재판을 속결, 이듬해인 1910년 3월에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 후 한일 강제 병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대조전 흥복헌 안에서 순종황제의 편을 들어줄 이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이런 순종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한 시간도 채 안되어 폐회선언과 함께 끝나버렸다. 이미 모든 것은 일본과 친일세력에 의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8월 22일, 순종의 날인까지 받은 일본은 다음 작전으로 들어갔다. 우선 조약 체결을 비밀에 부쳐두고 한반도 내 각종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봉쇄하여 원로대신들을 가택연금시킨다. 언론탄압으로 백성의 귀를 막고 사회 지도층의 움직임까지 원천 봉쇄한 후 병합사실을 발표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은 합의하에 합병되었다고 공포한다. 창덕궁 대조전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 승하한 곳이며, 519년 조선왕조 영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서글픈 역사의 현장이다. - <조선 궁궐 사건> 중에서

세 번째 통감 데라우치는 <대한민보>를 폐간하고 <대한매일신보>를 판매 금지하는 등의 언론탄압으로 한국인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린 후 조정을 친일파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친일파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한일강제병합을 진행,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 정도가 올해 100주년이 되는 경술국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창덕궁 대조전은 이처럼 경술국치의 치욕과 통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대조전 흥복헌은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곳이다. 얼마 전 창덕궁에 갔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창덕궁 대조전은 장희빈이 부귀영화를 꿈꾼 곳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지라 보물 제815호로 지정된 창덕궁 희정당에 관심이 우선 머물렀었다.

쏭내관이 들려주는 조선시대 크고 작은 이야기들

또 다른 궁궐들, 그 궁궐들의 다른 전각들이라고 특별하게 바라 봤으랴만,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올해, <조선궁궐사건>(지식프레임 펴냄) 을 통해 만나는 경술국치의 현장 중 한곳인 '창덕궁 대조전'은 남다르게 보였다. 창덕궁 대조전뿐이랴. 책을 통해 만나는 궁궐의 전각들이 다시 보인다.

600여년전 세종대왕이 걸었던 근정전 어도. 근정전에서 본 근정전 뜰과 근정문이다. 2009년 4월 5일 촬영
 600여년전 세종대왕이 걸었던 근정전 어도. 근정전에서 본 근정전 뜰과 근정문이다. 2009년 4월 5일 촬영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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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현장인 건청궁 일부. 설명에 의하면 옥호루에 시해한 시신을 안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던졌다고 한다. 2007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2009년 4월 5일 촬영
 명성황후 시해현장인 건청궁 일부. 설명에 의하면 옥호루에 시해한 시신을 안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던졌다고 한다. 2007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2009년 4월 5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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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의 특정 건물을 제외하자면, 사실 궁궐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거의 다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모든 궁궐을 다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며 그 건물에서 있었던 사건, 또 그 건물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때 궁궐의 모습은 제대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근정전 앞마당에서 1418년에 세종대왕이 즉위식 날 걸었던 어도를 따라 걸으며 세종의 모습을 상상하고, 경회루 2층을 보며 1455년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눈물을 머금고 옥새를 전했던 모습을, 창경궁 영춘헌 창살 안을 보면서 사투를 벌였던 개혁 군주 정조의 모습을, 그리고 90여 년 전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3·1독립운동 당시의 함성 소리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 <조선궁궐사건> '들어가는 글'중에서

<조선 궁궐 사건>은 이처럼 이제까지 우리들이 문화유산 혹은 사극 속 옛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으로 바라보기 십상이던 궁궐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쏭내관'이란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저자는 조선의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그 사건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전각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들려준다.

책은 5부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경희궁)에 기준하여 5부로 나눈 다음 특정 전각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야기는 모두 46꼭지, 이야기에 앞서 각 궁궐들의 역사 및 사건들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 궁궐에 대한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2010년 가을 복원을 끝내고 우리에게 돌아올 광화문 복원 조감도. 2009년 4월 광화문 복원 공사현장 조감도 촬영
 2010년 가을 복원을 끝내고 우리에게 돌아올 광화문 복원 조감도. 2009년 4월 광화문 복원 공사현장 조감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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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을 끝내고 올가을 우리에게 돌아올 광화문 복원현장 부분으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있던 용성문 발굴 복원 현장에 해당한다. 2009년 4월 5일 촬영
 복원을 끝내고 올가을 우리에게 돌아올 광화문 복원현장 부분으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있던 용성문 발굴 복원 현장에 해당한다. 2009년 4월 5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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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은 처음에 오문(吳門), 또는 정문(正門)이라 했으며, 세종 8년인 1426년에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의 올바름이 광화문을 통해 세상에 나가고 광화문을 열어 세상의 인재들을 불러 모은다는 뜻이니. 광화문은 정말 멋진 철학을 담고 있는 듯싶다. 이런 광화문의 철학은 그 뒤 많은 임금들에 의해 실천으로 옮겨졌다.

500여 년 전 광화문 앞은 미천한 농민의 하소연부터 양반들의 쓴소리까지 백성들의 소리가 모이는 곳이었다. 비록 광화문 안 주인들은 모두 떠났지만, 지금도 광화문 앞 광장은 여전히 크고 작은 민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광화문 앞 광장을 거닐다보면 백성의 희로애락을 전해 들으려했던 선대왕들의 통치이념을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 <조선궁궐사건> '광화문, 만백성의 소리를 들어라' 중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이 몇 년간의 복원을 끝내고 2010년 가을 우리에게 돌아올 예정이다. 저자는 조선 건국과 함께 활짝 열린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 대한 정도전의 기록부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까지 모두 들어 알리라고 1466년 6월에 세조가 어명을 내린 일, 조선 제12대 임금인 인종이 승하했을 때 광화문에 몰려든 인파 등에 대해 들려준다.

지난 어느 날 무심코 밟았던 궁궐 마당에서, 예사로 스치고 말았던 궁궐 건물에서 수백 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책이나 사극을 통해 만났던 그 역사적 사건과 사연들이 훨씬 생생하게 전해지리라. 나아가 우리의 궁궐들이 다시 보이리라. 책은 이처럼 궁궐을 훨씬 생생하고 의미 있게, 다시 만나게 하는 길잡이가 되리라.

덧붙이는 글 | 궁궐,조선의 역사를 말하다-<조선 궁궐 사건>|송용진 (지은이)|지식프레임|2010-05-15|정가:16000원



조선궁궐사건 - 궁궐,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송용진 지음, 지식프레임(2010)


태그:#궁궐, #창덕궁 대조전, #대조전 흥복헌, #경술국치, #정미 7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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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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