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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떠나는 여행은 늘 그렇다. 한 달 전부터 잠바를 사야 한다느니 가방을 사야 한다느니 여행을 한다는 것을 '뭔가를 새로 사야 한다'로 시작하는 엄마, 참으로 일관적이시다. 20살만 되면 어른이 된다고 믿었던 나, 이제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내 몸 어딘가에 어른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른의 세계는 나와는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철없는 착각이 든다. 맞다. 난 아직 철없는 딸, 그런 내가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 지난 6월 말의 이야기다.

'끝내주는 바다'를 가야 하는 이유

아야진 해수욕장. 투명하게 다른 물빛으로 빛나는 이 해변을 엄마와 몇 번이고 걸었다.
 아야진 해수욕장. 투명하게 다른 물빛으로 빛나는 이 해변을 엄마와 몇 번이고 걸었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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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동해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 나에게 속초는 꿈의 도시다. 학창 시절 친구와 느닷없이 떠났던 속초. 민박집 쪽창문으로 들었던 파도소리는 아직 내 머릿속에 그대로 세팅되어 있다.

속초를 선택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20대 시절 서울발 최단거리에 있는 바다,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엄마와 휴가를 떠났었다. 빛의 속도로 도착할 것만 같았던 그곳은 지하철과 배, 버스를 번갈아 타야 했고 저질 체력의 우리는 가다 지쳐 쓰러질 뻔했지만 '바다를 보리라'는 셀렘으로 기운을 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곳엔 바다가 없었다.

서해의 '물때'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우리는 철썩 거리는 파도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고 '저 멀리 바다가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며 돌아와야 했다. 그래도 엄마는 그때의 암울한 휴가를 아직 근사한 바다구경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거다.

그리하여 난 엄마에게 그저 바다가 아닌 '끝내주는 바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바다여행에 문외한인 나지만 내 곁엔 인터넷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행지는 물론 교통편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갈 곳을 속초로 정한 나는 끝내주는 바다에 걸맞은  럭셔리한 숙소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고 의외로 그런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럭셔리한 펜션'을 예약하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바라본 안개 낀 풍경이 나름 운치 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바라본 안개 낀 풍경이 나름 운치 있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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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진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펜션이다. '아야진'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지만 그곳엔 근사한 사진의 펜션이 있었고 푸른 빛 동해가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 달 전에 예약을 마쳤고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다.

동부터미널에서 미시령을 지나는 속초행 직행버스를 타라고 한다. 직행이라도 한 번쯤 휴게소에서 쉴 테고 통감자 정도는 먹어줘야 버스 여행이랄 수 있겠다. 그렇게 버스로 두 시간 이십분을 달리면 속초터미널에 도착을 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30분 가량을 들어가니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택시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고층의 희번덕이는 펜션이 아닌 언덕 위의 하얀 집 아닌가.

아뿔싸! 사진과 현실은 달랐다. 사진만 믿고 바다가 보이는 넓은 객실을 상상했던 나를 비웃듯 '상상하는 만큼 실망할 것이다'라는 나의 인생철학이 또 한 번 들어맞았다. 그곳은 바다가 보이는 주거용 단층주택을 개조해 여러 개의 룸을 만든 다세대의 주택과도 같았다.

사진구도의 현대기술은 좁고 아기자기한 룸을 근사한 호텔식 객실로 상상하게 했던 것이다. 문을 열자마다 비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방과 물풀장, 거실 침실보다 더한 것은 공사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새 집의 페인트 향이었다. 좁은 공간에 대한 답답함 뿐더러 유독 냄새에 민감한 엄마는 잠시 짐을 푼 지 5분도 안 돼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속이 메스껍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다.

"엄마 미안해, 사진빨이었어"

안개 가득한 설악산의 모습이 한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안개 가득한 설악산의 모습이 한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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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걱정 말라며 큰소리쳤던 엄마 앞에서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한 난 말했다.

"사진빨이었어."

물론 쇠라도 씹어 먹을 젊은 나이에 이곳을 찾았다면 창문만 있는 너저분한 민박이라도 젊음의 열기로 극복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엄마와 난 그러기엔 이미 지친 나이의 모녀였던 것이다.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객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우리 베란다 앞엔 앞집의 파란색 지붕까지 존재했다. 그것도 필요이상으로 가까운 곳에. 마치 이 방이 생기기 전에 이미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듯이.

여행을 오기 전, 펜션 사장님과 몇 번의 통화를 거친 뒤였기에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대놓고 우울해 하는 우리의 눈빛을 보신 사장님은 서둘러 바다가 보이는 옥상으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그랬다. 그곳은 바다가 보이는 높은 지대의 민가를 개조해 만든 집이었다. 앞집과 뒷집에는 그곳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펜션과의 경계도 담도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물론 좁아도 좋긴 하다. 좁아서 더 좋을 연인들만의 장소로는 최적이었으며 실제로 그곳은 한 달 정도 예약이 만료된 곳이기도 했다. 주말을 낀 2박 3일에 31만원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 이 펜션은 '불타는연인버전'으로 안성맞춤이다. 엄마와 지내는 이틀 내내 여기저기 젊은 연인들뿐이기도 했고 그 사이를 서성이는 우리 모녀는 이상하게 돈 안 내고 들어온 객처럼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곳은 옆 객실의 베란다와 우리 베란다가 트여있는 구조였으며 바깥출입을 할 때도 그들의 베란다를 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편하진 않았고 엄마께도 죄송했다. 그래도 우리는 기꺼이 완불한 손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불을 한 손님은 무조건 대접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즐겁게 푸욱 쉬다 가자며 엄마를 부추기며 해변으로 향했다.

해운대와 경포대 같은 상가나 모텔이 즐비한 해변을 보아왔던 나에게 아야진의 한적함이, 여행은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어느 정도는 걸맞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 우리는 바다를 보러왔고 여기 바다가 있다."

우리를 위로하는 바다는 너무도 근엄하고 예쁜 빛으로 그곳에 있었다.

'불타는 연인버전'의 펜션을 나서며

권금성으로 향하시는 엄마의 뒷모습
 권금성으로 향하시는 엄마의 뒷모습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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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때까지 해변을 걷고 물빛을 감상하고 가만히 서서 바다를 느꼈다. 그리고 횟집을 찾아 싱싱한 자연산 회를 먹은 후 돌아와 거실에 마련된 연인용 물풀에서 엄마의 피로를 푸시게 했다. 그리고 밤이 돼 산책을 하며 밤바다에 드리운 오징어배 불빛도 구경하고 먼 곳에 있는 치킨 집도 찾아내 치킨과 맥주도 몇 개 사서 들어와 여행의 첫 밤을 보냈다.

둘째 날 오전 그곳에서 준비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우리는 택시를 불러 설악산으로 향했다. 흐리고 비도 간간이 뿌리는 날씨였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랐다. 안개 가득한 설악산 길을 엄마와 걷는 것을 언제 또 해 볼 수 있을까. 날씨가 좋지 않아 더 좋은 풍경을 놓치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안개 낀 설악산의 풍경도 나름 분위기 있다.

우리는 설악산 공원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시원한 황태 해장국과 산채비빔밥에 좁쌀 막걸리도 한 잔씩 마시며 점심식사를 하고 대포항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삼십 여분을 가니 바다의 싱싱한 횟감들을 진열해 놓은 듯 상가들이 좁은 골목에 가득하다.

좁은 상가 골목을 뒤로 한 한가로운 대포항의 모습
 좁은 상가 골목을 뒤로 한 한가로운 대포항의 모습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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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엄마는 싱싱한 산 문어를 사셨고 오징어순대와 새우튀김 감자전과 마른오징어까지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1박2일> 촬영지로 유명한 아바이마을이란 곳도 갈 예정이었지만 많은 짐을 들고 움직이는 것은 무리이기에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대포항에서 사온 음식들을 맛보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강릉과 속초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아야진 해수욕장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해 있다. 다른 곳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동쪽 끝 마을인 그곳은 군사 경계지역에 속하기도 한다. 군복을 입은 군인도 간혹 눈에 띄었고 상가는 많지 않았다. 복잡하지 않은 맑은 물의 해변가, 내가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바로 그런 곳이다.

돌아오는 아침 우리의 우울한 객실에서 엄마는 사장님과 말씀하신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와 사업을 시작한 까닭에 원주민의 텃새가 심하다'로 시작한 사장님의 말씀은 자식들과 친정엄마에 이어 교회이야기로 마무리됐고, 엄마는 당신 70평생의 엑기스만을 적당히 추려 말씀하신 후 역시 자식들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신다. 나이 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을 쉽게 열수 있다'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좁은 객실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는 속초 터미널로 향할 때까지 바다를 보며 해변을 거닐었다. 분명 이곳이 그리워질 거라는 말을 나누며.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난 생각한다. 이제부터 순진하게 사진빨을 무조건 믿지는 말아야지. 끝내주는 여름휴가의 추억은 올해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의 투명한 바다 빛은 잊지 못할 것이다.

대포항의 싱싱한 해산물들 왼쪽 우편에 김이 모락한 오징어 순대도 보인다
 대포항의 싱싱한 해산물들 왼쪽 우편에 김이 모락한 오징어 순대도 보인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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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화끈하게> 공모기사



태그:#이 여름을 화끈하게, #펜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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