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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서 머문 지난 닷새간 연락 취할 방법이 없어 편지가 늦었습니다. 진해에서 거제까지 밀린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기자 주)

놀람과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가 이렇듯 다채롭고 혼자 있는 시간이 이처럼 충만할 수 있음이 새삼 놀랍고 기뻤습니다. 온전한 자연은 그 자체로 사람을 즐겁게, 사색하게, 감탄하게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요. 오늘은 진정 행복에 겨웠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진해 이동마을 전경
 하룻밤을 보낸 진해 이동마을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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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사람이 이래 좋다, 꼭 알리라"

아침부터 마음이 급했습니다. 낡디 낡은 여관방이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사흘째 불볕더위를 쬐며 산과 평야를 쏘다녔더니 시원한 바다가 간절했습니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행여나 떨어질세라 짐판에 단단히 묶고 길을 나섰습니다. 

장복산 아래 이동마을은 투박하고 정겨웠습니다. 한 가지 단점은 근처에 폐기물과 하수처리장 등이 있어 가는 곳마다 은근한 악취가 풍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낸 잔여물이며, 그곳에 생업을 둔 이웃도 있으니 인상 찌푸릴 일은 아닙니다.

속천 부두와 진해 재활용품 선별장을 거쳐 에너지관을 구경하려는데 문.득. 움찔했습니다. 어? 어? 카메라가 없었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실으면서 숙소 앞 화단 위에 놓고 온 것입니다. 두해 전 큰 맘 먹고 장만한 DSLR입니다.(손에 익질 않아 주로 '똑딱이'를 쓰고 있지만) 곧장 자전거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여관 주인 할머니와 카메라를 보관하고 있던 동네 할아버지
 여관 주인 할머니와 카메라를 보관하고 있던 동네 할아버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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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여관 안으로 들어서니 할머니가 "와 다시 왔노?" 했습니다.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혹시 못 봤냐 하니 금시초문이란 표정입니다. 그러고는 "우짜노 우짜노" 같이 걱정을 하십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나갈 때 누구 못 봤나" 물으시니 동네 주민인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기억났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옆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곤 "카메라 하나 못 봤나" 하는데 이어서 "거 있길래 내 주서놨다" 하는 대답이 들렸습니다. 그때의 감격이라니…. 놀랍기도 좋기도 해서 펄쩍펄쩍 뛰는데 할머니께서 "돈 만 원 드리라. 술도 받아주고" 했습니다. 사례함이 마땅했습니다. 이만 원을 드릴까 하니 할머니께서 "아이다 그거는" 하십니다.  결국 술도 돈도 됐다 하시는 이웃 할아버지께 억지스레 만 원을 쥐어 드렸습니다.

카메라를 찾은 것 말고 분명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냐"며 자리를 못 떠나고 있으니 할머니께서 딱 부러지게 한 말씀 했습니다. "됐다 마. 진해 사람이 이래 좋은기라. 내 그래서 이 동네 이래 오래 안 사나. 어디 가거덩 진해 사람 좋다고 꼭 알리라."

행암마을 전경
 행암마을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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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가득 바다가 들어왔다

흐뭇한 맘으로 이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풍호에서 행암, 수치에서 원포, 죽곡에서 명동, 이어서 삼포, 영길, 안성, 안골까지 20km가 넘는 해안도로를 달렸습니다. 행암에선 운치있는 횟집에 들러 멍게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눈앞에 푸른 바다 감상하며 매운탕까지 곁들이니 홀로 요란한 호사를 누리는듯해 미안했습니다. 

행암에서 멀지 않은 수치 해안은 고즈넉하다던 설명과 달리 지척의 STX 조선소 때문에 소란스럽고 구린내가 심했습니다. 포구 옆 정자에서 잠깐 더위만 식히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언덕을 오르며 거대한 선체 조각을 용접하는 조선소 근로자들을 봤습니다. 가만있어도 자칫 까무러칠 법한 날씨에 보통 수고가 아닙니다. 한편으로 마을 어귀에서 봤던, STX에 항의하는 주민일동 플래카드가 떠올랐습니다.

30도가 넘는 불볕더위 아래 STX 조선소 노동자들
 30도가 넘는 불볕더위 아래 STX 조선소 노동자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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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갈등 해결의 열쇠는 기업에 있지 싶습니다. 기업의 대표들은 기술 개발에 앞서 인격 수양에도 열의를 쏟아야 합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성이 결여되고 철학이 얕은 사람이 권력을 쥐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런 상황에 개인들의 의지마저 약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요즘 사회 이슈들을 접할 때면 매번 하는 생각입니다.

명동에선 자연풍광의 절정을 맛봤습니다. 잠시 가려졌던 바다가 다시 나타나고 잘 닦인 해안 도로 우측으로 '눈부시다'와 '황홀하다'는 두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귀경이 펼쳐졌습니다.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동섬이 떠 있습니다. 섬은 물 밑으로 옅게 드러난 바닷길로 이어집니다. 연인 한 쌍이 무릎 위로 옷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선착장에선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우도와 소쿠리섬을 갈 수 있습니다. 

진해 명동의 동섬
 진해 명동의 동섬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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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오후 3시30분경이었습니다. 따끔거리는 종아리와 얼굴에 선크림을 덧발랐습니다. 곧바로 오르막이 이어지는 터라 영 엄두가 안 났습니다. 행여 안골 가는 차가 있음 신세를 지려 했으나 '쭈쭈바' 하나를 다 먹는 동안에도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가자!'

작정하고 오르니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가로수 그늘 아래 바람이 시원해 편했습니다. 가다보니 삼포가는 길 노래비도 보였습니다. 노래 만든 이해민이 당시 8월에 이 일대를 여행하며 노랫말을 지었다는데 '그리움을 충족하기에 충분한 마을'이란 가사가 공감 됐습니다.

영길마을 초입 정자에서 만난 할머니
 영길마을 초입 정자에서 만난 할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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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길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갈림길 오른편 정자에 홀로 앉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쉬기도 하고 말동무도 해드릴겸 곁에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바람이 안 분다 했습니다. 연세가 아흔을 넘기셨다는데 정정하고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할머니를 알아본 젊은 여인 둘이 살갑게 말을 거는데 도시에서 보는 쓸쓸한 노인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때쯤 정말 다 왔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면 해안도로 끝에서 내륙으로 들어와 산 하나를 더 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골에 도착했습니다. 호수처럼 널찍하고 둥근 바다가 오후 햇살에 조용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동에서부터 약 8시간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배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 왔습니다.  

7시 막배를 타고 45분 만에 장목 간곡이란 곳에 내렸습니다. 바다 건너 오던 길, 현대 신항만도 보고 12월에 개통하는 거가대교도 봤습니다. 어쨌거나 사람 기술이 대단하긴 합니다. 여정의 피날레는 바다 한가운데서 본 낙조였습니다. 온종일 파란 하늘과 바다에 취해 있다 주홍빛 노을에 물들었습니다.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섬은 이제 온통 어둠입니다. 선착장 근처 펜션에 방을 구했습니다. 대부분 단체 손님을 받고 있어 숙소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운좋게 이곳 주인을 길에서 만나 3만 원에 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뭐가 되는 날입니다. 땀에 흠뻑 젖은 옷가지들은 방 한쪽에 벗어뒀습니다. 빨래할 기력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내일 하루 쉬어가야 겠습니다.  

거제 가는 뱃길. 현대 신항만과 거가대교(상단 좌우) 등 볼거리도 많습니다.
 거제 가는 뱃길. 현대 신항만과 거가대교(상단 좌우) 등 볼거리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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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서 본 낙조
 바다 한가운데서 본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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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 안골마을 풍양카훼리 매표소에 있는 백구입니다. 아직 걸음이 서툰 아기 개인데 이 녀석 아빠가 모 회사 사료모델 출신이랍니다.

풍양카훼리 매표소 아기 백구
 풍양카훼리 매표소 아기 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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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내여행, #경남, #진해 , #편지 , #모세의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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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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