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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담양 오층석탑. 뒤쪽으로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길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담양 오층석탑. 뒤쪽으로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길이 보인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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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진다. 맹렬하다. 마치 도로 위로 물동이를 통째로 들이붓는 것 같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라남도 담양으로 내려가는 길. 일기예보대로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이렇게 비가 오지는 않았는데 고속버스를 타고 전라북도로 들어설 무렵, 비가 눈앞을 가릴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의 사물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모습을 바꾼다.

비가 오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냉방이 잘된 버스 안에 들어앉아 마치 옷을 입은 채로 냉수욕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조금 심란하다. 이런 상태로 여행이 가능할까? 자동차여행도 아니고 자전거여행을, 이런 폭우 속에 낯선 고장, 낯선 길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녀도 괜찮은 걸까?

담양천변 관방제에서 건너다 본 죽녹원 전경.
 담양천변 관방제에서 건너다 본 죽녹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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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어떻게 찍지? 지난겨울 눈 오는 날 사진을 찍던 것처럼 왼손에 우산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카메라를 작동하면 되는데, 그게 비 오는 날에도 가능할까? 버스로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계속 차창 밖을 살피지만 비가 얼마나 더 올지 알 수 없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버스가 어느 낡은 건물 앞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담양여객버스터미널이다. 전국의 버스터미널들이 앞 다퉈 개벽을 하고 있는 마당에 이곳 터미널만 눈치 없이 옛 건물,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 대신 옛날 버스 대합실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그 사이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긴 했다. 하지만 언제 또 폭우가 쏟아질지 모르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펴든 우산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져 내린다. 그런 가운데, 터미널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과 버스에 올라타려는 사람으로 대혼란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나마 자전거를 가져오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날씨에 자전거까지 가지고 다녔다간 꽤 곤란한 지경에 빠질 뻔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가는 길. 왼쪽) 안내판이 서 있는 도로. 오른쪽) 도로 옆 가로수길 입구. 자동차 진입 금지 표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가는 길. 왼쪽) 안내판이 서 있는 도로. 오른쪽) 도로 옆 가로수길 입구. 자동차 진입 금지 표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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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을 빠져나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찾아간다. 담양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꼭 들르는 게 되는 곳이다. 내가 지금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를 보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자전거대여점을 찾기 위해서다. 오늘은 그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탄 다음, 담양읍 일대를 유유자적 돌아볼 생각이다.

터미널에서 버스가 들어오던 길을 되짚어 나간다. 왼쪽으로 붉은 색 아스콘이 깔린 인도 겸용 자전거도로가 있다. 그 길에서 멀리 하늘 위로 불쑥 머리를 드러낸 고깔 모양의 메타세쿼이아가 보인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 길이 바로 내가 찾는 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길 앞에 친절하게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로 가는 길임을 가르쳐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가로수길이 아니다. 길 양쪽에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것은 같지만, 그 길 한가운데로 자동차들이 맹렬한 속도로 지나다니는 게 다르다. 한가롭게 풍경을 즐기고 서 있을 수가 없다. 그 길을 무작정 걷는다. 물웅덩이를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분명 이 도로를 에돌아가는 길이 있을 텐데, 그런 길을 찾을 여유가 없다. 비는 내리고, 뒤에서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동차들이 비에 젖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온다. 그 길을 빠져나오는데 참 짧고도 긴 시간이 흐른다. 길 중간에 '담양읍오층석탑'이 서 있지 않았다면, 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층석탑 근처에 마련된 쉼터에서 한참을 쉬어 간다. 이곳에서 비를 그을 만한 곳이라곤 오로지 이곳뿐이다.

비가 오는 날의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비가 오는 날의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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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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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가로수길까지 약 2km.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누가 이곳까지 찾아올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사람이 많다. 내리는 비에 이랑곳하지 않고 가로수길 가운데에 서서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자전거 대여점은 이 가로수길을 좀 더 걸어 들어가면 나온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자전거가 많지 않다. 비가 와서 몇 대 꺼내 놓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무엇을 골라 타야 할지, 마땅한 게 별로 없다. 개중에 제일 낫다 싶은 걸 골라잡았는데 브레이크가 느슨하다. 자전거 대여는 1시간에 3천원. 적당한 가격이다. 시간을 초과할 경우, 그에 맞게 추가 요금을 지불한다.

자전거 대여점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도로 밑을 관통하는 개구멍이 하나 있다. '관방제' 가는 길이다. 그 길로 들어서면 '관방제림'을 지나, 영산강 지류인 담양천이 흘러내려가는 방향으로 둑길을 따라 영산강까지 달려 내려갈 수 있다.

관방제는 담양천변에 쌓은 제방이다. 1648년 성이성 부사가 영산강 지류인 담양천에서 발생하는 홍수를 막기 위해 처음 제방을 쌓았다. 그러고는 제방 위에 나무를 함께 심기 시작했다. 나무를 심은 건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서 관방제 위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중에 하나로 꼽히는 '관방제림'이 형성됐다. 그때 심은 푸조나무나 팽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랐다.

관방제림.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 나무뿌리.
 관방제림.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 나무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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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제림 입구.
 관방제림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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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제 위 1.2km 구간에 200년 이상 된 거목들이 굵은 뿌리를 드러낸 채 서 있다. 무성한 가지는 거의 제방을 뒤덮을 정도다. 낮게 드리우고 있다. 숲이 아니면서 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비가 와서 더욱더 검게 보이는 숲 속, 제방이 비좁다 싶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에게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

나무 하나 하나 신목이 되고도 남을 기품이 있다. 사실 관방제림의 나무들은 수백 년 제방을 지키고 마을을 보호해 왔으니, 수호신으로서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만하다. 나무 하나 하나 고유 번호가 적힌 표찰이 달려 있는 게 예사롭지 않다.

자전거를 탄 나는 그 길을 허리를 깊이 구부리고 지나간다. 어떻게든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산책을 나온 관광객들이 드물어 다행이다. 이 길은 사실 자전거를 타기보다는 걷기에 더 적당하다. 관광객이 많을 땐, 자전거에서 내려 걷거나 관방제림 아래 천변 길을 달려야 한다. 둑길을 달리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길가 정자에 앉아 비가 내리는 담양천을 내려다보는 한가로운 풍경과 자주 마주친다. 관광지라기보다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길을 지나가는 기분이다.

관방제림은 죽녹원으로 건너가는 다리(향교교) 앞에서 끝난다. 그 다리 앞을 지나면 아스팔트 둑길이 나오다가 양각교라는 이름의 다리 앞을 지나면서부터 시멘트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온다. 그 둑길을 따라 담양천이 거친 소리를 내며 쉼 없이 흐른다. 장마 탓에 물살이 몹시 거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소리 그 물살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거친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는 영산강
 거친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는 영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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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1533년(중종 28) 송순이 지어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면앙정. 1533년(중종 28) 송순이 지어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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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교를 지나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땅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흙탕물이 몸을 적시기 시작한다. 어느새 이 빗속의 자전거여행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양각교를 지나 400여 미터를 더 달려 내려가면 영산강이다.

처음 여행에 나섰을 땐 제방 위 둑길을 끝까지 달려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빗발이 너무 거세다. 영산강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누런 흙탕물이 수중보를 넘어 강 바닥에 높이 자란 갈대들을 우수수 쓰러트리며 거침없이 흘러 내려간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결국 제방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자전거를 돌려세운다. 여기까지 약 6km. 돌아오는 길에는 제방에서 내려와 887번 지방도로로 올라탄다. 그 길에 잠시 면앙정에 들른다. 면앙정은 과거엔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 앞으로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그 도로를 계속 따라 올라오면, 다시 버스터미널이다.

비가 오는데 무슨 자전거여행이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전거여행을 하다 보면 금방 알게 된다. 때때로 비가 오는 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유쾌한 일도 없다. 남들 눈엔 철없는 짓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은 마치 하늘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 오는 날 유의할 점


1) 과속하지 않는다. 길 바닥이 미끄럽고 브레이크 패드 역시 젖어 있는 상태라 평상시보다 제동거리가 길다.
2) 급회전, 급제동을 하지 않는다. 미끄러질 위험이 높다. 도시에서는 페이트 칠한 점자블록이나 잘 다듬은 대리석 바닥, 나무데크 같은 것들이 유난히 미끄럽다. 낙엽이 쌓인 길도 상당히 미끄럽다. 특히 주의해야 한다.
3) 갈아입을 옷을 준비한다. 자전거를 타고 난 뒤,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최소 상의 한 벌 정도는 가져가는 게 좋다.
4) 앞서 가는 차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제동거리도 그렇고, 자동차나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시야가 좁아지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확실히 날이 무더운 날보다는 비가 올 때 내 몸에서 더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야 하는데 날이 너무 무덥다 싶을 땐, 차라리 비라도 좍좍 뿌려줬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된다. 요즘 불쾌지수가 짜증을 유발하는 수치를 뛰어넘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때맞춰 비라도 온다면, 이때가 기회다라고 생각해볼 만하다.

죽녹원 건너편 관방제 둑길 위에 국수거리가 있다. 국수집만 대여섯 곳은 되는 것 같다. 국수만 파는 게 아니라, 한방 약재를 넣어 삶은 달걀을 같이 판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딱 어울리는 메뉴다. 담양 하면 떡갈비와 죽통밥이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국수가 더 입맛을 당긴다. 연초에 이곳의 국숫집들이 의견을 모아 이 거리를 담양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고 주변을 새로 단장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 출출할 때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영산강 강변 풍경. 멀리 산 위로 검은 구름이 짙게 내려 앉아 있다.
 영산강 강변 풍경. 멀리 산 위로 검은 구름이 짙게 내려 앉아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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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16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관방제림, #관방제, #메타세쿼이아, #담양, #영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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