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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륵암 가는 길

자우홍련사 툇마루에서 바라 본 일지암
 자우홍련사 툇마루에서 바라 본 일지암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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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공양을 마치고 8시 반쯤 무인스님과 우리 일행은 북미륵암으로 향한다. 일지암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먼저 자우홍련사 비슷한 누마루 기와집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스님들이 다담을 나누는 장소로 쓰임직한데 지금은 관리가 안 되어 퇴락해 보인다.

일지암에서 북미륵암까지는 1㎞ 남짓의 거리다. 그러나 해발이 350m에서 520m로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다. 또 두륜산이 은근히 암산이어서 길이 그렇게 평탄하지도 않다. 가는 길에 보니 가끔 축성흔적과 건물터가 보인다. 축성은 돌을 쌓은 것에서 알 수 있고, 건물터는 깨진 기왓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화를 나누는 무인스님(오른쪽)과 북미륵암주 스님
 대화를 나누는 무인스님(오른쪽)과 북미륵암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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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분쯤 올랐을까? 북미륵암이 나타난다. 북미륵암은 하단의 요사채 영역과 상단의 용화전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1995년 4월에 중수했다. 무인스님은 요사채에서 나오는 북미륵암주 스님을 만나자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차를 한 봉지 건네준다. 그리고는 그간 못 나눈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우리는 두 스님을 남겨둔 채 계단을 통해 용화전 영역으로 올라간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해 1985년 4월에 중수하였으며, 미륵부처를 모시고 있어 용화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제 현실세계에서 미래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무인스님이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하던 그 미륵부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한반도 최고의 마애불좌상이라 일컫는...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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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전 문을 통해 보여지는 부처님의 첫인상은 근엄하면서도 후덕하다. 근엄한 것은 치켜뜬 눈썹 때문이고, 후덕한 것은 양각이 두드러진 볼 때문이다. 연꽃 위에 결부좌한 본존은 두광과 신광이 모두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광배는 삼중(三重)의 원으로 이루어졌고, 두광과 신광의 밖에는 불꽃무늬(火焰紋)를 새겼다.

어깨가 넓고 건장한 상체에 비해 하체의 표현은 빈약한 편이다. 그 때문에 수인(手印)과 발의 세부묘사가 부자연스럽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왼쪽어깨에 띠 매듭이 보인다. 이 매듭은 가사(袈裟)를 묶는 띠로써, 서양 고전주의 예술이상인 '고귀한 단순성(edle Einfalt)'을 보여준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420㎝이며, 신라 말 고려 초(850-932)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아래 공양비천상
 오른쪽 아래 공양비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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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애불에서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여래좌상의 사방에 대칭적으로 배치된 비천상이다. 이들 중 위의 두 구는 하강하는 모습이고, 아래 두 구는 공양하는 모습이다. 하강하는 비천상은 각각 오른 무릎과 왼 무릎을 세우고 삼매에 빠져 있다. 그리고 공양하는 비천상은 오른 무릎은 세우고 왼 다리는 꿇은 자세이다.

얼굴이 위를 향하고, 왼손은 왼 무릎위에 얹고, 오른손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래의 나투심을 축하하는 듯하다. 이들 공양비천상은 조형적으로 대단히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중에서도 오른쪽 아래 비천상이 더 인상적이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악기로 보인다.

용화전 안에 모셔진 마애불
 용화전 안에 모셔진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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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불의 대좌에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간결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법당에 모시는 불상과 바위에 새기는 마애불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특이한 수법을 보여준다. 이 마애불좌상은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불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상호(相好)와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인 10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두 기의 삼층석탑

북미륵암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은 마애여래좌상이다. 그러나 2기의 3층 석탑도 놓칠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 기법을 계승한 고려 초기 작품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석탑 중 용화전 옆에 있는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옥개석을 올린 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
 북미륵암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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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탑의 각 부분이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2층의 기단부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있는 중대석을 올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으로 이루어졌고,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율이 높아져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그 위 일부 석재만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훼손되었다. 1970년경 이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금동불상 3점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성보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 탑과 비슷한 또 하나의 석탑이 가련봉 쪽 산마루에 있다. 이 탑의 공식명칭은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다. 자연석 위에 1층의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삼층을 얹은 형식이다. 자연석은 부처님의 손바닥처럼 다섯 개 손가락까지 표현했다. 이 탑은 원래는 3층 탑신까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95년 3층 옥개석과 상륜부를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
 북미륵암 동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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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부분이 복원됨으로써 탑은 훨씬 유려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끼가 낀 아랫부분과 새로 만들어 붙인 윗부분의 차이로 인해 시각적인 부조화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탑은 산마루의 곡선과 어울려 고고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절집이나 자연과 어울릴 때 더 높은 차원의 종교성과 예술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에서는 두륜산의 대표적인 봉우리인 노승봉과 가련봉 그리고 두륜봉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 노승봉 능허대에서 가련봉에 오른 다음 만일재를 거쳐 두륜봉에 이르는 능선길은 두륜산의 종주 코스로 산악인들이 즐겨 찾고 있다. <대둔사지>에 따르면 두륜산의 정기는 중국의 곤륜산맥(崑崙山脈)에서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삼층탑 너머 가련봉과 두륜봉
 동삼층탑 너머 가련봉과 두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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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의 지맥이 백두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금강산과 속리산, 서석산(현재 무등산)과 월출산을 거쳐 대둔산(현재 두륜산)에 이른다고 한다. "대둔산은 산꼭대기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쭈빗하고, 골짜기들은 사방을 에워싼 채 백리나 내리 뻗어 한 판 큰 형국을 이루고 있어 여느 산과도 견줄 수 없다."

일지암을 떠나며

나무와 대화하는 무인스님
 나무와 대화하는 무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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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륵암을 보고 우리는 다시 일지암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무인스님은 친환경적인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나무를 껴안으며 교감을 하고, 버섯이나 자생란과 같은 식물들과 대화도 한다. 사실 식물들과의 대화라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말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자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일지암으로 돌아오니 10시 20분이다. 벌써 한 무리의 손님들이 자우홍련사에서 투병 중인 처사님과 다담을 나누고 있다. 다들 진지하면서도 만족스런 표정이다. 아내와 나는 호림당으로 들어가 또 다시 무인스님이 내는 차를 마신다. 정말 차는 마셔도 마셔도 물리지를 않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다 스님이 우리의 스케줄을 물어본다.

일지암 호림당의 다기
 일지암 호림당의 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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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오후 2시쯤 완도에서 청산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을 타야 한다고 얘기를 한다. 그러자 스님이 점심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나는 대흥사 공양간에서 점심을 먹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럼 자신이 차로 우리를 대흥사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이거 마지막까지 스님의 신세를 진다. 요즘 말로 토탈 서비스다. 그 바람에 걸어 내려가면 30분 정도 걸릴 시간을 차로 5분 만에 도착한다. 우리는 보현전 위쪽에서 내려 스님과 작별을 고한다.

대흥사를 떠나며

점심공양을 마치고 나서 종무소로 간다. 그곳에 가서 회향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대둔사지>를 한 권 얻기로 했다. 이 책은 1997년에 나왔고 현재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종무소를 나오다 보니 어제 열린 '서산대제' 때 제출한 학생들의 글쓰기 대회 원고가 보인다. 동상을 받은 해남 제일중학교 2학년 강성준의 원고다.

금귀대장 장승
 금귀대장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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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대장 장승
 수조대장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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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를 나오는 길은 들어갈 때의 역순이다. 해탈문과 부도전을 지나 일주문에 이른다. 일주문 앞에서 차를 타려고 하는데 장승이 눈에 들어온다. 금귀대장(禁鬼大將)과 수조대장(受詔大將)이다. 여기서 금귀란 잡귀를 막아준다는 뜻일 텐데, 수조란 무엇일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금귀수조(禁鬼受詔)가 연결되어 잡귀를 막도록 명령을 받은 대장이라는 말이 된다.

일주문을 벗어나면 이제 정말 대흥사를 떠나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천천히 차를 몬다. 가다 보니 천연기념물 제173호인 왕벚나무 자생지가 보인다. 시간이 있다면 잠깐 보고 가겠는데 뱃시간에 맞춰 완도 여객선 터미널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다음을 약속하며 북일면을 지나 남창으로 향한다. 그렇게 가는 길이 거리상 조금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두륜산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 완도로 들어간다.


태그:#북미륵암, #마애불좌상, #공양비천상, #삼층석탑, #두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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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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