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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결인 채, 순이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소리를 들었다. 쩝쩝 음식 씹는 소리, 댕그랑 수저가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 기침 소리, 말소리, 웅성거림, 잠깐 침묵, 다시 웅성거림, 쩝쩝, 댕그랑, 큰 목소리, 작은 목소리, 그리고 침묵, 또 기침 소리, 웅성거림...순이는 아득한 곳에서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소리들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꺼플이 자꾸만 까물대면서 간지러울 지경인데도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왜서 잤너? 후회가 되었다. 누가 억지로 재운 게 아닐까, 의심이 됐다. 할아버지가 절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금방 저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현실이 비현실 같았다. -<순이>중에서

한밤중의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순이는 잘 참다가 어느 순간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순이는 음식을 먹는 낯익은 소리에 잠이 깼으나 멋쩍어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잠든 척 숨죽이고 있다. 명절이나 제사 때만 어쩌다 보는 집안 어른들까지 와 있어서 더욱 어색하기만 하다. 할머니나 철이가 깨워 주었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기척이 없다.

바쁜 숟가락질이 어느 정도 오고 간 후, 할아버지가 순이도 깨우라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야속하게도 "자는 아를 깨워서 뭘 해유. 얼매나 먹겠다구. 아침에 일어나서 먹으문 되지", "저게 절을 했어유. 심부름을 했어유? 뭘했다고 깨워유? 고샐 못 참구 자빠져 자는 기…, 저건 지 동상 발꿈치도 못 따라가유, 두고 보세유"라며 정색하고 만다.

결국 순이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한마디씩 거들고, 동생 철이가 흔들어 깨워서야제사 음식을 얻어먹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과 멋쩍음 등으로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다. 게다가 소나기 내리듯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할머니가 제 앞에 놓아준 탕국이며 밥그릇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니 같은 건 나가 죽어두 눈 하나 꿈쩍 안 해! 주제꼴두 모르고 어디서 울어?

그런데 엄마는 이처럼 모진 말을 보태고 만다. 주인공 순이는 동생 철이처럼 '고거 하나' 안 달고 나왔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늘 괄시와 차별을 받는 6살 소녀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순이에게 이처럼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패악스럽게 대하곤 한다.

순이는 누운 채 젖은 광목 빤스를 벗었다. 흠뻑 젖어 뻣뻣해진 광목은 도르르 말리면서 내려갔다. 순이는 살갗이 쓰라려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무어라고 욕을 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지 않아 그저 입술만 부어올랐다.…키를 뒤집어쓰고 소금을 얻으러 간 게 닷새 전이었다. 머리에 뒤집어쓴 키 위에다가 병학이 어머니가 왕소금을 냅다 던지면 우박 맞는 것보다 더 귀가 먹먹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학이 어머니는 우레같이 소리를 질렀다. "요너러 오줌싸개 또 왔구나아! 에이끼! 다시는 오줌 싸지 마러라아!" …오줌 싼 걸 들키면 안 되는 다른 이유는 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순이가 겨우내 몇 번이나 오줌을 싸서 이불이 당해내지 않는다고….-<순이>중에서

오줌싸게 순이의 유일한 말벗은 할머니

<순이>(이경자, 사계절)는 여성문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절반의 실패>(푸른숲)로 당시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던 소설가 이경자의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3년 강원도 양양, 한국전쟁이 휴전되던 그해 봄부터 이듬해 순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다. 소설을 통해 1950년대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순이> 겉그림
 <순이> 겉그림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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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지간한 남자애들보다 개구쟁이인 순이가 이불에 오줌을 싸고,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것을 어떻게 모면할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삿날 풍경도 낯익다. 어린 시절 종종 순이처럼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먹으며 두런대는 소리에 멋쩍어 일어나지 못했던 한때를 아슴아슴 떠올리게 한다.

전쟁이 터지자 식구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 피난 갔다가 돌아온 순이 아버지는 걸핏하면 어머니를 폭행하고 식구들에게 행패를 부린다. 때문에 소설 속에서도 순이네 집은 몇 번이나 발칵 뒤집힌다. '군복을 입진 않았어도 군인'인 아버지 덕분에 장거리에 옷 수선 집을 내 군복 수선을 하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어떻게든 돈을 모아 남매를 가르치는 것이다.

군인들 숙소에 아침밥을 해주는 할머니는 늘 허방으로만 떠도는 아들(순이 아버지), 남과 북으로 갈려 전쟁터로 떠나 소식이 없는 두 아들, 걸핏하면 자신을 무시하는 할아버지와 돈 좀 번다고 무시하고 막말도 함부로 하는 며느리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산다. 이런 할머니의 유일한 말벗은 순이.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냉이 중에 뿌리가 커 보이는 것을 두엇 골라 손가락으로 흙을 훑고 입으로 한 번 더 씻어 순이에게 주었다. 순이가 냉이 뿌리를 아작아작 씹었다. 그 입술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가 침이 고인 목소리로 물었다. "마숩녀?" "응! 아주 마수워!"

"니는 할머니가 좋니. 나생이가 좋너?" 할머니가 시침 뚝 뗀 표정을 하고 짐짓 사무적으로 물었다. 순이는 할머니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여전히 할머니는 순이의 대답을 들어 보려고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날래 말해봐. 그기 뭐이 어룹너? 니 요 맘에 든 걸 말하문 되잖너"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순이의 가슴팍을 건드리며 말했다.

"나생이가 더 조워!" 순이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좁아진 눈자위로 웃음기가 잘금잘금 흘러내렸다. "그럼 니 나생이하구 살어!" 할머니가 순이를 밀어내며 골난 목소리로 말했다.-<순이>중에서


순이도 할머니가 엄마보다 편안하고 만만하다. 때문에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아마도 이 부분을 읽으며 기억 속 할머니를 떠올리며 눈시울 적시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동네 상갓집에서 어떻게든 손녀에게 맛난 것을 많이 먹이고 싶어 조바심을 내거나 누룽지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 먹이려고 종종대는 할머니의 애틋한 정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치열한 비극, 형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다

휴전이 된다. 어른들은 자주 수군댄다. 아무개가 빨갱이라고. 어울리거나 말이라도 섞으면 잡혀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순이 가족들도 또래 분이와 옥자가 빨갱이 자식이라며 함께 놀지 못하게 한다. 당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흔하게 겪었던 비극이란다. 그런데 소설의 배경인 양양 사람들에게 이 비극은 훨씬 치열할 수밖에 없다.

양양은 남북분단 직후 북한 땅이었으나 한국전쟁 직후 남한 땅이 되었다. 때문에 당시 한마을 사람들끼리 어제는 적군이 되었다가 오늘은 아군이 되어 종종 싸우곤 했었단다. 사정이 이런지라, 순이 삼촌들처럼 남과 북으로 갈려 전쟁터에 나가 형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불행도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소설에는 한국전쟁이 휴전되던 1953년 당시 양양사람들의 특수한 삶의 모습과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삶을 꾸리는 강원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사투리, 50년대 미국과 미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과 숭배, 맞고 사는 어머니와 폭행을 서슴지 않는 아버지,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당시 아이들의 일상 등과 맞물려 잔잔하지만 씁쓸하게 묘사되고 있다.

"동네 이장 뽑는데도 전라도와 경상도로 패거리지어 팽팽하게 몇 날 며칠을 싸우던 동네 어른들, 그놈의 아들이 뭐간데 딸을 내리 일곱을 낳은 끝에 낳은 아들을 온 가족이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냇가 아저씨네, 걸핏하면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 때문에 밤낮 없이 숨을 곳을 찾아 동네를 떠돌던 사촌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아득하게 밀쳐두고 있던 나의 유년시절, 그리고 그 속에서의 수많은 어른들이 자꾸 떠올랐다. 지난날 내 주변의 어른들도 소설 속 어른들처럼 수많은 전쟁들을 겪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꽤나 중요하고 치열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러나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린 그런 전쟁 말이다.

<순이>는 순이네 가족과 순이가 만나는 세상, 순이의 단짝 영이와 성당을 배경으로 큰 사건 없이 평화롭고 잔잔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씁쓸해지고 가슴이 아린 것을 어쩌랴.

소설 <순이>는 순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지난 세월 딸이라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차별과 괄시를 받으며 자란, 아들들을 위해 청춘의 꿈을 희생해야만 했던 수많은 순이를 자꾸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순이>|2010.6.28|사계절|9800



순이 (반양장)

이경자 지음, 사계절(2010)


태그:#성장소설, #이경자 , #절반의 실패, #양양(강원도),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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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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