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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고향 땅을 등지고 살고 싶을까 마는 UN국제이주세계위원회의 2005년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약 2억 명 정도가 고국을 떠나 이주노동을 하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 등으로 이주노동을 택한 이들은 한마디로 '꿈을 좇는 사람들'이다. 미국으로 떠나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한국으로 떠나면 '코리안 드림'을 꿈꾼다.

꿈을 찾아 떠났던 많은 이들은 단란한 가정과 아름다운 미래라는 꿈을 이루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꿈을 이루기도 전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또, 기대에 못 미친 소득 혹은 이주노동자 가족의 지나친 소비 확대로 다시 해외 이주 노동으로 떠밀리며 가족 해체라는 현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해외로 이주노동을 떠나려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이 해외이주청에서 접수하는 모습. 이들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 해외이주노동 접수 창구 해외로 이주노동을 떠나려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이 해외이주청에서 접수하는 모습. 이들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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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700달러 받는 가수 꿈꾸었던 줄리안

월급 700달러 받는 가수. 줄리안이 꿈꾼 코리안 드림이었다. 야윈 몸매에 큰 눈동자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게 했다. 스물다섯 살이라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치 가녀린 줄리안. 그를 더 작아 보이게 한 건 시커멓게 멍든 주사 바늘 자국이 가득한 팔을 다른 한 팔로 감싸느라 몸이 오그라들어서였는지 모른다. 그런 줄리안을 곁에서 안쓰럽게 바라보며 동행한 이는 그의 어머니와 이모였다.

신장투석을 받는 줄리안의 팔뚝 전체가 검게 멍들어 있다.
▲ 주사로 팔뚝에 멍이 든 모습 신장투석을 받는 줄리안의 팔뚝 전체가 검게 멍들어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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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줄리안은 E6비자를 받아 가수의 꿈,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다. 그러나 그녀가 정작 일한 곳은,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라 동두천 기지촌에 위치한 '아**'이라는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줄리안은 노래를 하지 않고, 바텐더로 일을 했다.

엄연한 대한민국 땅이지만 미군에 의해 통제되는 곳, 기지촌. 70~80년대 개발독재 시대, 한국인 여성들이 소위 '양공주'라 불리며 미군을 상대로 술을 팔고, 웃음을 팔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줄리안이 만난 사람은 GI(주한미군)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같은 필리핀인 외에도 인도, 스리랑카, 터키, 방글라데시인들을 상대로 술을 팔기도 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했고, 주말과 휴일에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매월 700달러 고정급'이라는 약속이 있었지만, 첫 달 급여는 송출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필리핀 프로모션에 뺏겼다. 그 다음 두 달은 약속 금액의 절반을 받았는데, 그나마 매니저 비용으로 매달 100달러를 뺏겼다. 매니저는 필리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해 4월부터 2007년 10월에 그만둘 때까지 급여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클럽은 집에 돌아갈 때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줄리안은 숙식을 제공받으며 한주 평균 30달러 정도의 팁으로 생활해야 했다.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와중에 같이 출국했던 12명의 친구들 중 열 명은 주한미군과 결혼하여 클럽을 떠났다. 친구들은 코리아를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창구로 활용한 것이다. 미군들과 술을 마시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동료들과 달리 줄리안은 언젠가는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했다. 결국 3년 가까이 됐을 때 힘든 한국생활을 접고 귀국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줄리안에게 돈이 없다는 말만 했다. 결국 줄리안은 2년 10개월치 급여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클럽을 나왔다.

클럽을 나간 줄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주한미군과 결혼한 친구들이 알선해 주는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나마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길거리에 쓰러진 줄리안을 택시기사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신장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그해 11월 성매매이주여성을 지원하는 민간단체의 지원으로 아픈 몸을 안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 원망하지 않아요... 바라는 건 '기적'

더 많은 사연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지만, 줄리안은 동행한 엄마와 이모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하기에 부담스러워했다. 축 늘어진 어깨에 그녀의 삶의 짐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줄리안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미라클'. 기적을 바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한국 사람들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자기가 길거리에 쓰러졌을 때 병원에 데려다 준 것도 한국인이었고,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도와준 것도 한국인이었고, 귀국하고 싶어도 돈 한 푼 없어 애태우던 그녀의 항공료를 내준 것도 한국인이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녀의 팔뚝은 일주일에 두 번씩 신장투석을 받느라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저 기적을 바랄 뿐이라는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워진 듯했다.

꽃보다 아름다웠을 줄리안의 꿈을 앗아간 E6비자는 어떤 비자인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도입됐던 E6비자는 당초 취지와는 달리 내국인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에서 외국인 여성들이 공연토록 허용함에 따라 매춘 강요, 폭행, 여권 압류 등 숱한 인권침해 문제를 낳는 단초를 제공해 왔다.

줄리안의 경우 필리핀 프로모션을 통해 가수로 입국했지만, 결국 일하게 된 곳은 기지촌 클럽이었다. 신분증 압류와 임금체불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은 기지촌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마침 줄리안이 동두천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주한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동두천 일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시끄럽던 시기였다. 동두천을 향한 대한민국의 시선은 싸늘했고, 그곳에서 한 푼 월급도 없이 일하던 줄리안이 마땅히 손을 내밀 곳은 없었다.

엄연히 대한민국 땅이면서도 주한미군의 통제를 받는 곳에서, 그녀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당한 고통은 개발독재 시대 우리의 언니들이 당했던 고통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기적' 뿐이다.

덧붙이는 글 | 2010.6.14-25일까지 필리핀 이주과정 전반에 관한,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중심으로 한 실태 조사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단순히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주와 관련하여 출국 전, 이주노동 현장, 귀국 후까지 이주과정 전반을 살펴보고,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이 차지하는 위치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향후 어떤 정책이 개발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고민을 담아보고자 한다.

이번 실태 조사는 기자 외에 아산외국인노동자센터 우삼열 소장, 박종우 활동가, 결혼이주여성인 안나, 의정부 엑소더스 이인화 간사가 동행했다.



태그:#이주노동, #예술흥행비자, #E6,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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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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