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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도 전염된다? 오늘(4일)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비만에 관한 기사를 하나 읽었다(비만도 전염된다? 기사 보기).

기사의 내용은 한 마디로 '뚱뚱한 친구를 곁에 두면 그 친구와 생활 패턴이나 습관이 비슷해져서 같이 뚱뚱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전염'인 셈이다. 아무래도 맛있는 걸 많이 먹는 친구 옆에 있으면 한두 입이라도 더 얻어먹게 되어 있다. 그러니 비만이 전염된다는 게 그리 황당무계하지는 않지만, 마치 예방하고 꺼려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전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적절치 못한 듯하다.

분석 결과 비만한 친구를 둔 사람이 뚱뚱해질 위험성은 그렇지 않은 친구를 둔 경우에 비해 57%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 내용 중에 위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같이 다니는 사람과 말씨나 제스처가 비슷해지 듯이 식습관이 비슷해져서 살이 찌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57%라는 다소 큰 수치가 놀랍다. 이 외에도 비만에 관한 다른 재밌는 기사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출산 후 여성들이 살을 쉽게 빼지 못하는 이유가 남편 때문이라는 기사였다(출산 후 비만, 남편 탓! 기사 보기).

기사의 내용은 배우자가 없는 여성보다 배우자가 있는 여성이 출산 후 10년을 기준으로 무려 7kg이나 더 살이 찐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는 수치 자체만 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다른 여러 요인을 무시한 단순통계를 적용했기 때문에 다소 오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류나 잘못된 단어 사용과는 별개로 두 기사를 읽으면서 신선한 시각에서 비만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남편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까지 비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신경 써서 연구할 정도로 요즘의 우리는 비만에 대해서 지나치게 민감한 건 아닐까.

비만을 보는 사회적 시선

보건복지부가 2009년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성인 3명 중 1명 이상, 소아·청소년 10명 중 1명 이상이 비만이라고 한다. 성인의 비만율은 1998년 26%에서 2007년 32%로 늘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단체로 통계를 낼 때 체지방 등은 제쳐두고 단순히 표준체중만을 이용해서 비만을 측정하고 다른 나라보다 비만 기준이 좀 엄격한 편이라 좀 과한 수치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공식적인 통계상 성인의 3분의 1이 비만이라니 놀랍다.

비만은 여러 성인병의 기준이 되고, 건강을 생각하면 당연히 좋지 않은 것이다. 비만이 점점 증가하는 만큼 통계를 내서 비만을 조사하고, 운동을 권장하고 사회적으로 그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인의 비만율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을 무시할 순 없다. 

영화 '슈퍼사이즈 미'
 영화 '슈퍼사이즈 미'
ⓒ Fortissimo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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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슈퍼사이즈 미>에는 패스트푸트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친근한 이미지로 무장한 채 시도 때도 없이 방송되는 맥도날드의 광고가 실제로는 필수 영양소가 거의 포함되지 않아 쓰레기나 다름없는 음식들을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규제를 주장한다. 광고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이 보는 시간대에 방송하는 횟수에 제한을 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비만의 사회적 책임이나 국민 건강을 생각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비만에 대한 비판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비만인 = 자기관리실패자'라는 공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잡은 건 오래이고, 뚱뚱한 사람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자신감 없어하고 수그러들기 일쑤다.

옛날에 <인간극장>에 초고도 비만으로 고생하는 한 여성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여성의 비만은 사회적인 스트레스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놓고 무시하고 손가락질하고 큰 소리로 '왜 저렇게 뚱뚱하지?'하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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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만에 대한 사회적 편견 -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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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관리의 이름으로 포장한 신체의 자본화

우리는 과연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비만을 비판하고 뚱뚱한 사람을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바라서 다이어트를 하고 몸 관리를 하는 걸까? 진중권은 자신의 책 <호모코레아니쿠스>에서 신체의 자본화와 다이어트를 연결지어서 말한다.

진중권씨의 책
▲ 호모코레아니쿠스 진중권씨의 책
ⓒ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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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의 시대가 저물면서 국가 차원의 집단적 신체 프로젝트는 사라지고, 대신 '다이어트'라는 이름으로 각 개인의 개별적 신체 프로젝트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먹을 게 부족해 '원기소'라는 알약으로 영양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던 시대에는 굳이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이어트'는 경제적 여유가 영양의 과잉을 낳고, 노동이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변하여 신체의 과잉 에너지를 소모할 기회가 줄어드는 시기에 등장한다.
- 진중권의 <호모코레아니쿠스>의  '존재미학' 中

근대화를 거치며 유럽은 귀족계급이 창조한 예법을 시민계급이 계승하고 근대적 형태로 발전시켜 상류층이 받아들이도록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인간개조를 통한 신체의 기계화였으며 출세를 위한 규격화가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그로테스크함'이 되었다.

신체는 자본화되었다. 신분제의 '성취'를 간과하고 '상징'만을 취한 자본의 유입은 그 자체를 천박하게 만들었고, 여성의 신체는 이미 자본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선은 일종의 권력이 된다. 그리하여 시선의 '주체-남성'에게는 미적 쾌감을, 시선의 '대상-여성의 신체'에게는 커다란 육체적 고통을 선사하기에 이른다."바깥에서 보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호모코레아니쿠스'를 읽고 블로거 '미스치루'님이 쓰신 글 中 발췌>
원문 : http://blog.naver.com/juvenilia?Redirect=Log&logNo=40060058627

<호모코레아니쿠스>에서는 여성만을 시선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현대인은 모두 시선의 '재단'에 시달리는 것 같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건강, 자기관리'라는 미명 아래 애써 치장하려 하지만, 사실 다이어트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야 극대화된 것이다. 그 도입과정이 경제적 발전과 함께하며 이리도 과열된(특히 한국에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을 자본화, 규격화 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끼리 서로의 신체를 자본화하고 또 재단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관리는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 것

비만에 관해서 과학적, 사회적으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자기관리'라는 말로 포장하며 나와 남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체에 끼워 맞춘다. 하지만, 그 자기관리로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있을까? 항상 먹을 것과 운동에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며, 인사말로 '살빠졌다','살 좀 쪘는데?'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사회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가 다이어트(혹은 자기관리)를 하는 이유는 나의 보람보다 남에게 어긋나게 보이지 않으려는 시선 때문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는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

진정한 자기관리는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관리하는 이유도 자기가 성취한 바를 이루고 자신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자기계발서'라고 포장하고 '회사인간 만들기', '같은 인간 만들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수많은 책들처럼 다이어트 역시 나의 행복이 아닌 남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실 내가 행복하고 나의 외모를 남들이 평가하려들지 않는다면 그까짓 비만쯤이야 전염되도 상관없는 일 같은데 말이다.


태그:#다이어트, #자기관리, #비만, #비만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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