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궁과녁 그림입니다.
▲ 국궁과녁 국궁과녁 그림입니다.
ⓒ 권오정

관련사진보기



국궁 과녁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운데 홍심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보면 같을 동자와 비슷한 모양의 국궁과녁.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과녁에도 역사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과녁을 보면, 요즘 국궁장에 있는 과녁과는 차이가 많이 있답니다. 천으로 만들어진 옛날 과녁 가운데에는 일반적으로 동물의 그림이 있거나 한문으로 된 숫자가 쓰여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북일영도라는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린 이는 김홍도입니다. 관아 밖 사장에서 활을 쏘는 관원과 과녁이 보이는 18세기 그림인데 지금의 과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아래 그림들에 나온 과녁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 보시죠.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린 이는 김홍도입니다
▲ 북일영도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린 이는 김홍도입니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관련사진보기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대사례도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연세대학교

관련사진보기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대사례도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연세대학교

관련사진보기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대사례도 대사례도라하며 1743년작이다. 문무를 균등히 중시하는 정신으로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대사례도는 영조 19년 윤8월에 행해진 대사례의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 병조판서였던 서종옥의 서문이 실려있다.
ⓒ 연세대학교

관련사진보기



왕이 쏘던 과녁, 웅후
▲ 과녁 왕이 쏘던 과녁, 웅후
ⓒ 권오정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전통활쏘기의 과녁이 지금처럼 변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징병당하는 모습
▲ 징병장면 일제치하에서 징병당하는 모습
ⓒ 경기도청

관련사진보기


강제징용 당하여 고향을 떠나기 전 소년의 모습들,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보입니다.
▲ 강제징용 강제징용 당하여 고향을 떠나기 전 소년의 모습들,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보입니다.
ⓒ 경기도청

관련사진보기


남양군도에 징병돼 부대 건설에 동원,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 1943년으로 추정
▲ 남양군도 남양군도에 징병돼 부대 건설에 동원,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 1943년으로 추정
ⓒ 경기도청

관련사진보기



위의 사진에 보이듯, 일본은 우리민족의 정신과 전통, 관습을 없애고 자신들의 전쟁 도구로 전락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활쏘기는 아시다시피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였지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도구로써, 전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무예로써 활쏘기는 한민족과는 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이러한 활과 활쏘기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지요. "활을 잘 쏴야 한량이냐, 돈을 잘 써야 한량이지..."라는 등의 유언비어와 노래를 만들어 유포시키고 활 쏘는 사람을 유흥이나 즐기는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상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역사적인 사실과 우리네 과녁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바로 일장기입니다. 국궁과녁의 홍심은 일장기입니다.
일본국기
▲ 일장기 일본국기
ⓒ 권오정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의 우리네 선비들은 일본을 향해 활을 쏘고 저항하는 의미에서 과녁에 일장기를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그것을 알아채고 보복할 것에 대비해서 같을 동(同)자를 써 넣어 그것을 숨긴 것이지요.

우리 국궁의 경우에는 과녁의 어느부분을 맞히든 관중으로 여깁니다. 과녁의 어디에 맞혀도 점수가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사거리가 145미터나 되니 사실 그 먼 거리를 날아가 맞혔다면 점수를 주는 것이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同자의 의미는 과녁의 어느 부분을 맞추어도 같다라는 의미랍니다. 양궁의 과녁은 가장 먼 것이 90미터입니다. 이렇듯 우리네 선조들께서는 일제치하에서도 일본의 국기에 화살을 날리며, 언젠가 돌아올 광복을 꿈꾸고 계셨던 것이지요.

주몽에서 나온 잘못된 과녁
▲ 과녁 주몽에서 나온 잘못된 과녁
ⓒ mbc

관련사진보기


위의 사진은 드라마 <주몽>에서 나왔던 장면 중에 하나인데요. 1900년대에나 생긴 과녁의 모양을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사용했다고 방송에 내보냈군요. 작가가 공부를 안 하고 만들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참고로 이 글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무형문화재 활쏘기 명인 장석후옹과 전 대한궁도협회 김정대 회장, 서울무형문화재 권무석 궁장의 말씀을 참고로 작성했습니다. 윗 글의 내용은 문헌으로 기록되어 내려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정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덧붙이는 글 | www.koreabow.com에 오시면 활과 관련한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태그:#각궁, #활쏘기, #비밀, #문화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