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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은 만남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 기약 없는 이별의 의식이었다. 헤어져도 아프지 않은 이별, 그리고 아이들을 잊었다.

1972년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중등의 경력까지 합하면 해직기간을 빼고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학교에서 살았다.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다행히 인간에게 망각의 특성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망각곡선만 없었다면 내 머리는 아이들로 꽉차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기쁨과 보람보다는 회한만 크다. 젊은 교사 시절도 즐거운 추억보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씁쓸한 후회가 더 많고, 10년간의 기나긴 해직기간도 가족들에게는 미안함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또 30년 가까이 교사로 살았으면서 이따금 연락이 되거나 만나는 제자가 많지 않다는 점도 나의 실패로 남았다. 인덕이 없다거나 인연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어떻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스승과 제자도 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찾아주는 제자는 반갑고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 군사부일체 운운하지만 내가 가르친 사람 모두가 제자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내가 스승이라고 해서 제자들로부터 진정한 스승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이 찾아주면 고맙지만 나를 찾지 않는 제자를 들먹이지 않았다. 또 억지로 제자를 만들 생각도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저 아이들에게 욕이나 먹지 않고 마칠 작정을 했다. 때문에 가급적 옛날의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교육문제에 관해 글을 쓰는 것마저 피했다.

제자의 가족과 함께 숙지원의 자두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 기념사진 제자의 가족과 함께 숙지원의 자두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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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토요일(19일), 1977년 광주 어느 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했던 시절의 제자를 만났다(이 경우는 제자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명심. 3월 어느날, 인터넷을 통해 알아냈다는 제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교사라고 나를 치켜세우는 문자를 받고 망각의 늪에 가라앉은 그 시절의 기억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반장이었으며,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였다는 사실, 가끔 명심이라는 이름을 두고 "명심해!"하며 놀렸던 일 말고는 건져 올린 것이 거의 없었다. 하긴 불과 몇 년 전 담임했던 아이들도 잊은 마당에 30년 전의 일들을 어찌 다 기억할 것인가!

그동안 몇 번 통화하면서 얼굴의 윤곽이며 글씨를 잘 썼다는 점 등을 기억 속에 추가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변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날도 점심이나 같이 했으면 어떻겠느냐는 갑작스런 전화를 받는 순간, 아내와 만나자는 약속까지도 잊고 말았다.

사실 초등에 근무할 때 인연을 맺었던 아이들과 지금까지 연락이 되는 경우는 주례를 섰던 재현이, 풍물을 하는 양균이 뿐이었는데 33년 전 졸업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기억해주는 제자가 있다니! 그게 어디 흔한 일이던가!

40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 남편과 남매까지 동반하고 나타난 명심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지나쳤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찬찬히 보니 그래도 옛날의 모습은 남아 있었다. 제자는 나에 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을 지적하며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의 제목이 '그집앞'이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 했다. 일기 검사 후의 댓글 이야기며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제자로 인해 까맣게 잊고 살았던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보면서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었다.

숙지원 잔다밭에서 수도 호스를 잡고 짓궂게 쫓아다니고 도망치는 오누이의 모습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장난하는 오누이 숙지원 잔다밭에서 수도 호스를 잡고 짓궂게 쫓아다니고 도망치는 오누이의 모습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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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원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감자 캐기, 보리수와 오디를 맛보면서 즐거워하고, 잔디밭에서 수도 호스를 잡고 다투는 오누이의 모습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옛날이야기,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만으로도 토요일 오후는 훌쩍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미대를 나와 그림을 그린다는 제자의 남편은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며 유화 한 점을 내밀었는데 쉽게 받기가 미안했다. 포장을 뜯어보니 비교적 단순한 구도임에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분명한 그림이었다. 제자가 손수 오래된 나무로 만들었다는 액자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남을 기약하며 제자의 가족은 돌아가고 아내와 나는 제자의 이야기를 하느라고 일손을 거의 놓았다.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그래도 가슴에는 여전히 고맙다는 말 한 덩어리가 남은 듯 했다. 3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생님"이라면서 제자임을 자처하고 나를 찾은 명심이에게 나는 무엇을 남긴 것일까? 흐뭇하면서도 나에게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다.

    제자의 남편이 그린 유화. 고목에 새싹이 돋는 감나무라고 했다. 액자는 오래된 나무로 직접 만든 또 다른 작품이었다.
▲ 선물 제자의 남편이 그린 유화. 고목에 새싹이 돋는 감나무라고 했다. 액자는 오래된 나무로 직접 만든 또 다른 작품이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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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대강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인공들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을 닮자고 했던 꿈을 꾸기도 했다. 권위주의적이고 반교육적인 이 나라의 교육현실을 바로 잡는데 밑거름이 되겠다는 각오로 치열하게 살았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이루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고 말았다. 자부심보다는 회한이 크다는 말이다.

졸업 후 지금까지 스승의 날이면 화분을 보내주고 더러는 명절을 챙겨주는 제자들도 있다.
현택이, 승백이, 유림이, 지호, 성환이는 얼마 전에도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다. 그런데 뜻밖에 초등학교에서 만난 인연을 새긴 제자가 있다니! 가족과 함께 소박하게 사는 모습을 들고 찾아오다니! 더구나 나는 사회적으로 출세도 못한 평교사 아닌가!

졸업! 인연이 다했다며 떠나보낸 아이들(지금은 모두 성인이지만)의 기억을 접었다. 어쩌다 연락이 되었던 제자도 교류가 끊기면 그러려니 했다. 가끔 헤어진 아이들 중 생각나는 이름도 있었지만 찾을 생각은커녕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간절하게 기원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졸업은 한 시절의 마침표가 아니라 가끔은 그리움의 도돌이표가  될 수도 있는 것을….

이제 내가 먼저 소식 끊긴 아이들을 찾아야겠다. 설령 이름은 잊었다고 해도 시간을 내어 지난날 인연을 맺은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겠다. 비록 상투적인 이야기일지라도 남은 기간 좀 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희망을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남,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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