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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곳에선 처음으로 투표를 한다. 작년에 이사했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 투표하는 아들을 포함 4식구가 1일 저녁 모여 앉아 각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고 정보를 나눴다. 그리고 각자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지를 가름했다. 물론 각자의 의견이 소중하다. 일단 너무 후보가 많고 복잡하기에 어느 정도의 교통 정리가 필요했다.

 

2일 아침 늘 하던 대로 한갓지게 오전 6시쯤 일어나 눈꼽만 대충 떼고 투표소로 향했다. 전엔 가까이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했기에 장소를 찾는 것도 수월했고 투표도 금방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장소 찾기부터 만만치 않았다. 바로 앞 아파트 단지 내 노인정이라기에 몇 동 안 되는 간단한 곳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실수였나 보다. 작은 단지라서 상가 안에 있으려니 하고 무조건 나섰는데 보이질 않는다.

 

사방을 살폈더니 A4용지에 인쇄된 화살표 한 장을 단지 안내도에 붙여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거다. 컬러로 그려진 단지 안내도에 붙은 작은 흰 종이가 눈에 잘 띌리가 없지. 

 

화살표 대로 가는데 그 다음이 또 보이질 않는다. 지나가는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그 단지 내에 사시는 할머니신지 방향을 가르쳐주시며 무지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더 황송했다.

 

노인이 뭘 잘못하신 게 있다고? 가르쳐 주신 대로 갔더니 아주 작은 노인정에 줄이 길게 서 있었고 앞 진입로는 주차된 차들로 꽉 차 있었다. 차 한두 대만 미리 옮겨 놨어도 조금 편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차된 차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돌아갔더니 이번엔 쌓아 놓은 흙더미가 앞을 가로 막는다.

 

산 넘어 산이다. 흙더미를 피해 옆으로 살짝 비켰더니 이번엔 등나무 줄기와 기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협소한 곳에 줄을 서야 한다. 줄 설 곳도 마땅치 않은데 줄도 줄지 않는다.

 

기다리는 중에 우리보다 예닐곱 명쯤 앞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며 돌아가기도 한다. 투표도 하지 않고. 딸로 보이는 20대 젊은이는 원래 투표할 생각이 없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어르신들 투표하러 오시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괜히 걱정이 앞선다. 협소한 데다 계단까지 올라가야 하고 투표소 안도 좁아서 사람들이 오다가다 몸이 닿을 만큼 좁다. 이러니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투표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노인정 계단 올라가는 왼편 베란다쯤에는 버려진 듯한 너저분한 소파가 불안하게 포개져 언제 굴러떨어질지 모를 상태다. 보는 사람도 불안해 눈살이 찌푸려진다.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결국 더는 못참겠는지 언성을 높인다.

 

"도대체 일하는 당사자들은 뭐하는 거요? 안내도 제대로 못하고 투표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편을 끼쳐서야 어떻게 주권행사를 한단 말이요? 투표를 하란 거요? 말란 거요? 어제 저녁에 차도1, 2대 정도는 빼놨어야 했고. 게다가 거의 같은 아파트 단지나 다름없는 곳에 사는 사람도 찾을 수 없도록 해놓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리고 안내하는 학생은 저 앞에 세워놔야지 노인정에 세워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요?"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는데 참고 있었는지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보탠다. 그러자 한 젊은 사람이 나와서 죄송하다며 바로 시정하겠다며 고개를 조아렸으나 이후에 시정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자원봉사하는 고등학생인 듯한 청소년은 아무말 없이 길게 늘어선 줄 옆에 조신하게 서 있을 뿐이다. 안내라는 어깨띠를 멘 채로, 이미 투표장에 온 사람들한테 무엇을 안내하라고 시켰는지.

 

차라리 길바닥에 화살표를 붙여놓고 따라오라고 했으면 좀더 쉬웠을 것이다. 보통 어떤 행사를 할 땐 길바닥에 붙여 놓는 것이 다반사인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그런 기본적인 절차도 고려를 안한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건물에서나 벽에 붙이는 것이지 시선이 분산된 옥외에서 이곳 저곳에 화살표를 붙여서 안내하는 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30여 분을 기다려 투표장 안으로 들어갔다. 투표장 안은 봉사하는 중장년 여성들로 꽉차 있고 기표소는 1차 투표에 기표소 4칸, 2차 투표에 기표소 3칸뿐이었다. 여기서 투표하는 인원을 물었더니 4000여 명 가량 된다고 했다.

 

들어가기 전 8장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찍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되뇌이고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내 소중한 한 표가 무효가 되지 않도록 긴장하면서 기표하고 다시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접어서 투표함 속에 밀어넣고 나왔다. 나의 소중한 권리 행사를 또 한번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내일 아침 또 한 번의 가슴벅찬 감동이 밀려오길 바라면서 집으로 오는데 아까 보이지 않았던 화살표가 보였다. 세워놓는 조그만 광고판에 소박하게 쓰여진 투표소 안내 화살표였다. 사진을 찍었더니 경비 아저씨가 묻는다.

 

"왜 찍어요?"

"불편해서 인터넷에 올리려고요."

 

아저씨도 공감하신다. 사람들이 하도 묻기에 당신이 지금 매직으로 써어 붙였다고! 그러면서 잘하지 않았냐고 나의 공감을 확인한다. 잘하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설마 투표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무성의하게 투표장을 만든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다. 선량한 시민이 가장 중요한 기본 주권 행사 좀 하겠다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많아서야.


태그:#투표소, #지자제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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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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