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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경찰의 날에 받은 감사장.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한 형사에게 야금야금 당했던 ‘스폰’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33년 전 경찰의 날에 받은 감사장.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한 형사에게 야금야금 당했던 ‘스폰’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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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나이가 켜켜이 쌓인 추억의 앨범을 정리하다가, 33년 전과 29년 전 경찰의 날에 받은 감사장을 발견했다. 왜놈 순사들의 만행이 해방 후에도 이어져 파출소 앞으로 지나가는 것조차 꺼리던 70년대 경찰서장의 감사장이어서 내놓기도 부끄럽다.

열심히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살아온 국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 나름의 애환과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가슴 아픈 경험과 공개하기 어려운 사연이 담겨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금은방을 경영하던 1974년 5월 이맘때였다. 늦은 아침을 먹고 10시쯤 출근해서 그날 결재할 거래처와 구입할 물건 항목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군산경찰서 수사과 형사였는데 한 사람은 수학여행 간 학생이 백화점 구경하듯 진열장과 벽에 걸린 시계들을 불러보았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B 형사는 신분증을 내보이며 경찰서까지 동행을 요청했다.  

B 형사는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고, 말에서도 위압감을 느낄 수 없어 편했다. 하지만, 경찰서까지 동행 요청은 오뉴월 보리껍질이 러닝셔츠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껄끄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따라 경찰서로 향했다.

처음 가본 군산경찰서 형사계   

당시 군산경찰서는 가게에서 10분 거리인 중앙로 백화탑 로터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지하 유치장 창문 쇠창살이 밖으로 돌출되어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으스스하다며 위압감을 느낀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군산경찰서. 유치장 창문이었던 자리에 대리석이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쇠창살은 해방 후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군산시 김중규 학예사)
 일제강점기에 지은 군산경찰서. 유치장 창문이었던 자리에 대리석이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쇠창살은 해방 후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군산시 김중규 학예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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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절도 폭력 사건 등을 담당하는 수사과 형사계는 지하에 있었고,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음습한 지하 통로를 지나 형사계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형사 10여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범죄자도 아닌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거운 돌이 어깨를 억누르는 것 같았는데 어렵게 고개를 드니까, 깡패 대장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 간신처럼 비겁하게 생긴 얼굴, 배불뚝이에 심술이 고약할 것 같은 얼굴, 평범한 직장인처럼 온순하게 생긴 얼굴, 선비 스타일의 얼굴까지 온갖 모습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 같았다.

불안감을 떨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B 형사가 의자를 내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면서 H 은행 여직원 전 모 양과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남의 여자관계 물어보려고 동행을 요청했나? 하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전모 양은 은행 직원들 친선 체육대회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나 데이트를 해오고 있었는데, 묻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B 형사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그 여직원이 오늘 새벽에 연탄가스로 죽었습니다!"라고 했다. 신고가 들어와 사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와의 관계를 듣고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가게에 들렀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다니 참으로 놀랍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경찰서 조사는 오히려 내가 질문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타살 가능성을 두고 찾아왔는데, 의심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으니까 그만둔 모양이었다. 

추억하고 싶지 않은 '스폰'의 기억

경찰서에 다녀와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는데 하루는 B 형사가 찾아와 얼마나 상심이 크겠느냐며 위로했다. 그때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친절하게 대해준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점심을 대접했다.

B 형사는 필자보다 열 살 정도 위였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형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경찰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말단 형사들의 애로점을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출소 방범대원 완장만 걸쳐도 먹자판으로 알고 똥파리처럼 달려들던 시절이었지만, 능력껏 '스폰'도 해주고 싶었다. 

수사비가 밥값도 안 되어 서울로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경비를 아내에게 조달할 때도 있다는 하소연은 서푼 짜리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파출소 소장이나 차석만 바뀌어도 돈을 뜯어가고, 운전사에게 '삥땅' 뜯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느꼈던 경찰에 대한 거부감을 친밀감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니까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어려움 없이 가게에 놀러 오곤 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잡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영업에 지장이 많았다. 눈치를 보는 아주머니 손님은 물론, '경찰관이 가게에 있으면 손님이 떨어진다.'며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게에 발걸음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지인도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얘기하기가 뭐해서 참았다. 조금 더 지나니까, 돈을 빌려가기 시작했다. 다급하니까 그러겠지 하고 빌려주었는데 10만 원이 넘어가면 7만-8만 원 정도만 갚으니까 잔금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B 형사는 갈수록 낯이 두꺼워지면서 노골적으로 부탁해왔다. 과장 인사이동이 있을 때 밥과 술을 사라고 했고, 전별금을 부탁했고, 새로 부임한 과장이 앉을 의자를 사주면 경찰의 날에 감사장을 준다거나, 보안과에 부탁해서 운전 면허증을 발급해준다고도 했다. 하지만, 필요 없다며 사양했다. 운전면허증은 지금도 없는데, 감사장은 두 차례나 집으로 보내주어 보관해오고 있다.

하루는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서장 때미 미치겠네, 5만 원만 빌려주라!" 하는 것이었다. 가장 비싼 담배 거북선 한 갑에 3백 원 하던 시절, 큰돈이어서 부담이 갔다. 하지만, 뿌리치지 못하고 빌려주었는데, 정말 서장이 빌려오라고 해서 쫓아왔는지, 미안하니까 핑계를 댔는지는 지금도 숙제로 남아 있다.

'도경국장'과 저녁을 함께 하기도

어느 해인가는 거래처 사장이 전북 도경 국장으로 발령받아 내려온 S씨가 자기와 '호형호제' 하는 선배이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며 으스댔다. 문득 B 형사 생각이 나기에 이야기했더니 모두가 환영해서 전주 모 한정식당에서 S국장을 모시고 저녁을 함께할 수 있었다.

말단 형사와 도경 국장의 저녁식사, 그것은 형사의 앞날이 보장되는 자리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B 형사도 전주에 가는 버스에서부터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하고 앉으니까 대화는 시냇물 흐르듯 시원스럽게 흘렀는데 S 국장이 기가 막히는 질문을 했다.

S국장: 군산은 비행장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양색시가 많다고 하던데?
B형사: 네, 비행장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 쪽에 있고, 양색시들은 주로 시내 영화동 근처에 셋방을 얻어 미군과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S국장: 그럼 양색시들 통해서 '롤렉스(Rolex) 시계'도 구입할 수 있겠네
B형사: 그럼은요. 필요하신가요?     

S국장: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B 형사는 그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자리를 마쳤다. 식대는 물론 B 형사가 지불하였고, S국장은 며칠 후 꿈의 시계로 불리던 '롤렉스시계'까지 얻어 차는, 횡재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S국장이 이튿날 군산경찰서장에게 B 형사 안부를 묻는 전화는 롤렉스시계 몇 개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뜨거운 감자!'였던 진술서 봉투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가게를 청소하는데 구석에 두툼한 서류봉투 하나가 있었다. 내 것이 아니어서 별다른 생각 없이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임자가 나타나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누가 놓고 갔는지,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봉투를 열어보니까 B 형사가 작성한 피의자 진술서가 들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서류를 놓고 다니다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파카만년필로 흘려 써놔서 읽기가 거북했지만, 서류마다 중간에 지장을 찍었고, 상단 결재란에는 형사계장, 수사과장 날인이 선명했다.  

공무원이 중요한 서류 봉투를 깜빡 잊고 놓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 출근하면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될 터이니 기억을 더듬어 찾으러 와야 한다. 특히 범죄자를 상대하는 형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보름이 되도록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수사과장이 결재한 진술서를 잃어버리고도 보름이 넘도록 탈 없이 근무하다니, 아직 세상물정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헷갈렸다. 진술서를 다시 작성했는지, 서류가 없어져 피의자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기다리는지, 구속되어 교도소로 송치됐는지, 아니면 과장 결재까지 받아놓고도 없던 일로 했는지 등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상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는데, 서류봉투를 미끼로 빌려간 돈의 10배는 받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돈을 떼이면 떼였지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빌려준 돈이라도 받아내고 싶었으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30년이고 40년이고 보관해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고민 끝에 돌려주기로 했다.

며칠 지나고 B 형사가 왔기에 "과장이나 서장에게 우편으로 보내려다가 직접 드리는 겁니다!"라며 웃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 이것이 여기에 있었네!"라며 첫아들 껴안듯 품에 안았다. 고개를 사방팔방으로 돌리면서 혹시 누가 봤느냐고 묻기에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더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심심 당부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서류봉투 사건 후에도 B 형사는 돈을 빌려갔는데 일지(日誌)를 쓰기 때문에 종업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잔금이 40만 원을 초과하니까 너무 당해왔다는 생각에 못난 나 자신이 미워지면서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복잡하다고 사정했더니 2-3회에 걸쳐 20만 원을 돌려주었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 격이었다.

82년에 결혼하면서 B 형사 발길이 끊겼으니까 8년 정도 '스폰'한 셈이 되는데, 그동안 빌려는 주었어도 그냥 준 돈은 없다. 그러나 20만 원 남짓은 지금도 잔금으로 남아 있는데, 미련을 두고 싶지 않다. 다만, 추억하고 싶지 않은 '스폰'이어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은 스폰서가 있습니까?'응모글



태그:#스폰서, #군산경찰서,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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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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