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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 대표가 그날도 옷 협찬 받는다고 무슨 디자이너 클럽에 데려가더라고요. 옷을 실컷 사주고 저를 집에 데려다 주는 줄 알았는데 모텔로 데려가더군요. 왜 그러시냐고 그랬더니 이쪽 일을 하려면 네가 아직 세상을 더 알아야 되고 남자도 알아야 되고…."

 

연기자 김이선(가명)씨가 밝힌 사례다. 이렇게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기획사나 방송 관계자, 사회 유력 인사에게 성접대 요구를 받은 여성 연기자가 10명 중 6명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여성 연기자 10명 중 6명, 성접대 요구 받아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 연기자 111명 중 60.2%가 위와 같은 제의를 받았다고 답했다. 장자연씨의 자살로 불거진 여성 연예인의 성적 결정권 침해 문제가 단지 한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사례가 아님이 드러난 셈이다.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시된 이번 조사는 2009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성 연기자 111명과 연기자 지망생 240명 등 3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발표가 27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 11층 배움터에서 있었다.

 

브리핑에 참석한 문경란 인권위원은 "여성 연예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서 고발하지 않으면 이런 실태가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문 위원은 "여성 연예인들의 침묵의 카르텔이 예상보다 너무도 단단해서 조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며 "여성 연예인들이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가지 이유로 "입을 여는 순간 고용기회와 연관되어있는 기획사 제작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장자연씨를 포함한 여성 연예인 지원 체계가 전무하며, 여성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여성 연예인을 성적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해야 한다) 매우 이중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연기자 지망생도 성접대 제의 받아

 

성접대 제의는 여성 연기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연기자 지망생 역시 연기자만큼은 아니지만 성적 결정권 침해를 당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내 친구의 경우인데) 내가 너를 데뷔시켜주겠다. 너 뜰 때까지 다 해주겠다고. 그 다음부터 기획사 사장하고 밥을 먹는데, 이제 들이대는 거예요. 뽀뽀도 하고, 이렇게 살짝살짝 만지고, 너 내 애인하자. 그래서 그 친구가 싫다고, 그래서 없던 일로 하고 빚은 도로 생기고."

 

실태 조사 과정에서 심층면접에 참여한 20대 초반의 연기자 지망생이 밝힌 사례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연기자 지망생 240명 중 29.8%가 성접대 제의를 받았다고 답했다.

 

기획사나 방송관계자들은 '갑'이고 연기자 지망생과 연기자들은 '을'에 관계에 놓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갑'이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악용해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을'은 이를 거절할 시 연예계 진출 기회 자체가 막힐까 두려워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실제 성접대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연기자 중 절반이 이를 거부한 후 캐스팅이나 광고 출연 등 연예활동에 불이익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여성 연기자 혹은 연기자 지망생의 경우 연예활동을 확보하기 위해 성적 자기 결정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공공연한 비밀, 스폰서

 

그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연예인 스폰서 문제도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이 이번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여성 연기자의 55%가 유력 인사와의 만남 주선을 제의 받았다고 답했다.

 

20대 초반의 연예인 지망생은 설문지에 "친구가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아빠같은 분이 나랑 애인할래 이렇게 물었다"며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고 나는 너의 젊음을 사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스폰서 제안 등은 주로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 시절에 집중된다. 스폰서 관계가 성적 거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제공해 주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스폰서 제안을 수락하지 않은 이들은 패배감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기회가 제공될 경우 이를 뿌리치는 일은 쉽지 않다. 개방형 설문지에 적힌 익명의 의견들에도 이러한 고민들이 묻어난다.

 

한 응답자는 "사실상 스폰서 없이 이쪽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또 다른 연예인 지망생은 "이쪽 남자들은 차라리 여자들은 몸이라도 팔 수 있으니까 좋겠다고 말한다"며 "어떤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성공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내 꿈을 짓밟는 연예계 너무 싫다"

 

많은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들은 벗어날 수 없는 상납 구조에 괴로워 하고 있었다. 조사 도중 심층면접에 참가한 연예인들의 답변에 그 절박함과 답답함이 담겨있다.

 

"인권 침해나 성상납 등의 문제. 매니저 사무실의 출연료 강탈의 문제로 문의하고 도움을 청해도 해결되는 건 없기에... 모두 개인 문제로 돌려서 도움을 주기 힘들다는 통지... 다시 반복적인 스트레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장자연 사건은 실제로 연예인이나 연예인 신인 지망생들에게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성상납이나 술자리 응대 스폰서 제의까지도 신인 프로 댄서인 나에게도 있는 사실이다. 억울하다. 진정으로 내 꿈과 열정을 짓밟아 버리는 한국의 연예계 현실이 너무 싫다."

 

꽉 막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난립하는 매니지먼트사를 관리할 수 있는 법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1차적으로 매니지먼트사를 통제해 과도한 연예인 지망생 공급을 막고 제대로 된 통로로 연예계에 데뷔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작사와 기획사 관련자 등이 자정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며 "많은 여성 연예인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만 개선될 것이라 믿지 않는데,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사태 해결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태그:#연예인 성 상납, #스폰서, #장자연, #인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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