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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주변에 시전이 있었다
▲ 종각. 종각 주변에 시전이 있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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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쇠가 우포청에 있던 시절, 사고가 터졌다 하면 피맛골이었고 사건이 생겼다 하면 운종가였다. 평양에서 박치기로 소문난 점돌이가 한양에 입성하여 똬리를 튼 곳이 피맛골이다. 이들은 단속하는 자와 단속대상이었고 피할 수 없는 갑과 을이었다.

시전(市廛)거리에서 의문의 변사사건이 터졌다. 점돌이의 부하를 범인으로 지목한 꺽쇠는 그를 체포했다. 철야 심문했으나 범행을 부인했다. 심증은 갔으나 물증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점돌이가 자신이 진범이며 부하는 희생물로 내세운 일회용이었다고 제 발로 걸어들어 왔다. 점돌이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 범죄인으로 투옥되었다.

풀려난 부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 왔으며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물증이 없는 포청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우포청이 물을 먹고 허우적대고 있을 때, 좌포청에서 검거한 다른 사건 피의자가 자신이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했다. 물증도 확보되었다. 결국 우포청은 점돌이를 석방하고 무고한 백성을 감금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꺽쇠는 자신을 물 먹인 점돌이가 곱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인간미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뭔가 빚을 진 느낌이었다. 꺽쇠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뒷배로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점돌이도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잡은 그들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점돌이가 꺽쇠의 손을 끌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 주막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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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났으니 주막에 들어가 목이나 축이시죠."

자리를 옮겼다. 주막에는 색색 치맛자락이 들락거렸다. 여각에나 있는 작부가 있었다. 난리 이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 다니는 여자가 많기로 서니 조그만 섬에 작부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맡겨 둔 꿩도 좀 볶고, 우선 한 호리 내오너라."

점돌이가 팔자걸음을 걸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주모가 수육에 갓김치를 올린 주안상과 호리병을 내왔다. 뒤이어 곱게 단장한 여자가 옆 자리에 앉았다.

"애들아! 귀한 손님이시다. 인사드려라. 이 손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성의 기찰..."
"이 사람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술이나 따르게, 목이 마르지 않은가?"

꺽쇠가 점돌이의 입을 막았다.

"얘들아 무엇하는 게냐? 형님이 목마르시다 하지 않느냐."

손가락이 예쁜 여인이 술을 쳤다. 섬섬옥수(纖纖玉手)다. 술을 따르는 손보다도 붓을 잡았던 손가락인 것만 같았다. 얼굴을 쳐다봤다.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여인의 눈매가 선하게 보인다. 주막으로 흘러 다니는 여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기억에 남아있는 여인, 어디서 보았을까?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혹시 심양에서 봤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자, 형님. 션하게 한 잔 듭시다. 드시고 기왕 아우네 왕국에 오셨으니 며칠 푹 쉬다 가십시오. 술이면 술, 고기라면 고기. 기집이라면 기집. 우리 애들 붙여서 황제로 모셔 드릴테니 염려 말고 푹 쉬십시오."

점돌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왕국이라니? 네가 저자도 도주(島主)라도 된단 말이냐?"
"도주가 뭡니까? 전 그 딴거 안합니다. 기냥 저자도를 접수했을 뿐입니다. 저애들 좀 보십시오. 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꺽쇠에게 덤볐던 사내들을 포함하여 건장한 사나이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주막 한 구석에서 주안상 하나 놓고 작부에게 수작을 걸고 있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주막을 빠져 나갔다.

"야, 술값도 안 주고 그냥 나가면 어떡하냐?"

주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술은 입도 대지 않았으니 술값은 없고 수작료(手作料)는 저 아이에게 주었느니라."

사나이가 손을 털며 멀어져 갔다. 손을 잡아본 값은 주었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주막을 빠져 나간 사나이는 나룻배에서 꺽쇠와 시비가 붙어 드잡이했던 맨상투 사나이였다.

난리 전, 주모가 국밥과 탁주를 팔며 잘 곳 없는 나그네에게 봉놋방을 내주는 것이 주막이었다.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여자들이 넘쳐났다. 주막에 흘러들어간 여자들이 주당들과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수작(酬酌)이다. 양파껍질 하나를 까면 또 까고 싶은 것이 사내들 욕심. 말을 텄으니 손을 잡아보고 싶다. 수작(手作)이다.

술 주자
▲ 주막 간판 술 주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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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따라 놓고 그냥 나갔으니 입에 술을 대보지 않은 거야, 잔을 대보지 않은 거야? 호호호."

작부가 둘이다. 하나는 섬섬옥수. 또 하나는 퇴폐미가 사내들을 자극하는 천박녀. 천박녀가 퇴폐스러운 요기를 뿜었다.

"요년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무리 이런데 흘러나온 여자라도 여자는 여잔데. 여자들이 그런 소리를 입에 함부로 올려?"

점돌이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큰 기침을 했다.

"그럼, 우리는 천한 것 들이라 하고 양반들은 자지도 않나요? 후후후."

천박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음담패설이 오가는 질펀한 분위기속에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네가 이곳엔 웬일이냐?"
"피맛골 일을 청산하고 지금은 대군 나리 댁에서 일하고 있습죠."
"대군 댁?"

꺽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군 댁이라면 임금의 동생 능원대군과 셋째 아들 인평대군이다. 놀라운 일이다. 피맛골 왈패가 대군 댁에서 일한 다는 것은 난세에나 가능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운종가-조선 초기, 황토현에서 흥인문까지 종로를 운종가라 불렀다. 종각 주변의 삼거리가 번화가였다.
시전-운종가에 있던 육의전
섬섬옥수(纖纖玉手)-갸날프고 고운 여자의 손



태그:#주막, #종각, #퇴폐미, #운종가, #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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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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