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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멜리아 레이디
▲ 강수진 발레 갈라 까멜리아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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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으로 향하는 길. 연둣빛 봄 기운이 완연한 거리를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운 건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한 편의 공연 때문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보여줄 레퍼토리부터가 심상치 않다. 고전발레 작품만 득세해 온 지난 한국의 무용계를 생각해 볼때, 그녀가 보여줄 네오 클래식 작품들, 흔히 모던 발레작품을 눈에 가득 담고 싶었다.

예전 인터넷에 한국인 최초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된 강수진의 발 사진이 올랐다. 무대 위 화려한 조명 속, 발끝으로 서는 균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발레리나의 발은 '환상을 깨려는 듯' 관절 마디마디가 일그러지고 부어있는 형상이었다. 평생을 휴가 한번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연습에 매진한 결과의 산물이었다.

모던발레 소품 <Vapour Plains> 중에서
▲ 강수진 발레 갈라 모던발레 소품 <Vapour Plain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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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갈라, 쏠리고 들끓다

오랜 세월 발레를 비롯해 무용 공연을 빼놓지 않고 봐왔지만, 한국 무용계의 큰 단점은 역시 레퍼토리의 부재다. 고전작품에 매몰된 나머지, 동시대적 고뇌와 도전, 현대성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지 못했다. 9일부터 11일까지, 딱 3일간만 진행되는 그녀의 '발레 갈라'에 출연한 4편의 소품 및 다른 작품들 모두가 네오 클래식 계열의 모던 발레 작품들이다.

유럽에서 발원된 드라마 발레의 산실이자 존 노이마이어, 지리 킬리언, 윌리엄 포사이드 등 세계적인 안무가를 잉태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강수진의 위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는 작품해석과 미세한 디테일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무용수다.

까멜리아 레이디 하이라이트
▲ 강수진 발레 갈라 까멜리아 레이디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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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한 마디로 충격이다. 극단적 우아함과 강건한 신체미를 바탕으로 했던 기존의 무용개념에, 현대적 특성이 아로새겨진 '극적 즐거움'과 '유머'가 돋보인 작품들이 무대위에 하나씩 올라왔다.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마이웨이> <에피>란 작품에선 상체를 벗은 남성 무용수의 뒷 모습에서 '육체를 통해 소통하는' 무용의 본질적 힘이 느껴졌다. 무용수가 토해내는 괴성과 더불어 격한 리듬의 팝송과 느린 자장가의 리듬을 결합, 독특한 작품을 완성했다.

우아한 이인무, 파드되의 세계
▲ 강수진 갈라 발레 우아한 이인무, 파드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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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에릭 고티에의 작품인 <발레 101>은 작품 제목처럼 발레의 기초동작인 101가지를 다양하게 변주, 웃음을 주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국내 초연작인 라흐마니노프의 <스위트 NO2>는 서호주 발레단과 함께 출연,  집단무의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칸딘스키의 '컴퍼지션' 시리즈 그림을 후면 배경에 사용한 점이 눈에 와 닿았다.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마치 캔버스 위에 점을 찍듯, 그림 속 점과 선, 면의 움직임을 체화 해냈다. 칸딘스키의 "점은 침묵과 언어를 잇는 연결"이라는 말처럼, 무용수의 몸은 침묵 속에서 소통의 언어를 발화한다.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강수진, 이슬이 되어 승화하다

세명의 남자 무용수와 함께한 강수진
▲ 발레 갈라 기자 간담회 세명의 남자 무용수와 함께한 강수진
ⓒ 오마이뉴스 문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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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이 연기한 <Vapour Plains>는 제목처럼 응결된 이슬이 되어 날아가는 듯했다. 바닥과 천장을 연결하는 백색 천은 구름을 상징하는 듯했고, 강수진은 한번도 땅에 발을 닿지 않은 채 남자 무용수에게 들려, 공중에 뜬 상태로 연기했다. 몸이 응결된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까멜리아 레이디>는 강수진의 부드럽고 섬세한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번 발레 갈라는 44살의 무용수가 가진 모든 걸 토해낸 무대다. 아름다움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건 그녀를 두고 한 말임을 인정한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섬세하게 조율하는 지혜의 몫이 커진 탓이리라.

함께 한 남성 무용수들과의 호흡은 경이에 가깝다. 타인의 숨결이 내 것이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문제다. 일그러진 그녀의 발이 떠올리고선, 눈물이 맺혔다. 한 마디로 놀랍다. 그리고 고맙다. 대한민국에 이런 발레리나가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경배를!

덧붙이는 글 | 다음뷰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강수진, #발레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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