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줄곧 바닷길을 따라 걸었지만 오늘은 잠시 뭍쪽으로 걷기로 한다. 이호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빠져나와 차들이 빠르게 오고 가는 길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버스 표지판에 '갈왓마을'이라고 적힌게 보인다.

 

제주도 말에 남아 있는 '아래아' 소리를 육지에서는 '아'로 소리내지만 이곳에서는 '오'나 '어'에 가깝게 소리내는 것을 무시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골왓마을'로 적어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골왓마을'에는 탑(방사탑)이 5기나 있다. 두 기는 신작로 따라 좌우로 놓여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 쉽게 찾은 덕에 주변 풍경과의 조화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른쪽 인도를 따라 조금더 걸어 오르다 샛길로 접어들면 마을 냄새가 난다. 좁다란 길따라 밭들이 놓여 있고 아래쪽에 살림집도 몇 채 보인다. 더 멀리엔 바다가 보이니 여기는 조금 높은 언덕지대이다.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내려가면 십자가 같기도 하고, 솟대같기도 한 나무로 만든 형상물로 얹은 탑이 보인다. 돌로 얹어 놓는 것이 태반인데 특이하다.

 

다섯 기 가운데 세 기를 보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2기. 구불구불 길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볼 수도 있지만 예서 돌아나와 원점으로 가서 볼 수도 있다. 나머지 두 탑은 푸르른 보리와 대파들이 자라난 밭들 사이의 밭담에 동과 서로 놓여 있다.

 

 

다시 이호해수욕장 방면으로 조심조심 길을 건너서 이번에는 서쪽으로 좀 더 걸어 내리막 샛길로 접어든다. 현사마을이다. '검은 모래'를 한자말로 푼 것이니 해수욕장도 이 마을 안에 드는 것이다.

 

포근한 봄날 바닷가에서는 웨딩드레스와 양복 입은 젊은 한 쌍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포구 방파제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는 모습도 보이고 바다 위에는 요트가 떠서 왠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포구 곁에 샘물이 하나 있지만 도로가 위에 놓여버려서 너무 어두워 제 구실을 하기 어려워보인다. 동물이라 불리는 곳이 여기일 듯하다. 

 

 

원장물을 찾아서 서쪽으로 더 걸어간다. 도로가 언덕에 막혀 끝이나고 남쪽으로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내도'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리 이름이 '원장교'이니 원장물도 이 부근일 것이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시멘트 벽으로 마감된 곳에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슬리퍼를 신은 여자 어린이가 나오는 게 보인다. '옳거니 저기로구나' 하고 다리를 가로질러 잘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다.

 

 

마을 어린이들이 낚시를 하며 놀고 있었다. 통에는 제법 큰 물고기도 한 마리 들어 있다. 이윽고 할머니 한 분이 오시고 빨래를 하신다. 목욕탕에서 쓰는 조그만 고동색 플라스틱 통에 옷과 방망이가 들어 있었다.

 

수도요금을 아끼려고 그러시는지 옛부터 해오던 습관적인 행위가 몸에  배어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매우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여행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샘물터를 만났지만 이런 살아있는 현장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홀로 나와 빨래를 하시면서도 원칙에 충실했다. 그 원칙이란 이런 것이다. 3단으로 나뉜 공간은 대체로 맨 위는 '식수', 그 다음은 '세수' 그리고 마지막엔 '빨래'가 그것이다. 비누가 없던 시절엔 빨래가 두 번째 칸에서 이루어졌을 게다. 맨 아래쪽에 요망지게(야무지게) 앉아 빨래를 하는 할머니의 품이 예사롭지 않다.

 

빨래를 하시다 말고, "야, 너네 저레 나강 허라(저리로 나가서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샘물터 안에서 낚시놀이 하는 아이들이 맘에 안 들었을까? 아니면, 떠드는 소리 때문에 빨래에 집중하기 어려웠을까? 아무래도 앞쪽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 없던 시절을 모르고 물 귀한 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설명할 겨를도 방법도 없을 터이니 그저 "나가 놀아라~!" 하는 듯 말씀하신 듯하다.

 

아무 불평없이 나가서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이들도 참 착하니 그래도 언젠가는 그 간극이 메워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이 되면 오늘 이렇게 물가에서 놀았던 것이 한 편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워 하겠지. 어른이 되어 바라보는 나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일어서 걷는다. 한라산 머리가 조금 옆쪽을 보이고 있으니 서쪽으로 좀 더 온 것이 확실하다.

 

조그만 원장교 다리를 지나고 나서 이어진 언덕을 건너면 이제 '내도' 땅에 닿은 것이다. 다음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태그:#원장물, #골왓마을, #현사마을, #이호, #제주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