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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의 출판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감정'에 관한 책들이 다수 출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주제에 대한 주목에 앞서 그 발생 배경을 먼저 살펴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감정에 대한 몇몇 책의 출판을 하나의 유행쯤으로 여긴다면 새로운 주제가 하나 발견되었다고 그 의미를 치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정이란 새로운 주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여길 문제가 아닌 듯하다.

인간의 사유나 행동을 '머리'와 '가슴'으로 양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존 관심사는 가슴 쪽이라기보다는 대개 머리 쪽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소위 지식이란 문패가 걸린 것이라면 그것이 책이든 대담이든 대개 '어떻게 인식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준비된 답변처럼 냉철한 사유를 앞세웠다. 실제 우리의 가슴이 어떻게 느끼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동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부각시킨 손유경의 <고통과 동정>의 필자 소개란을 보면 그러한 배경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적이고 부차적이고, 즉흥적이고 개인적인, 비역사적이고 몰가치적이라는 오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감수성과 정서'의 문제를 본격 연구의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당분간은 식민지 시기 문학과 문화 텍스트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감성 연구라는 이 뭉툭한 테마를 벼리는 일을 계속할 듯하다."
- 손유경, <고통과 동정> 책날개, 역사비평사, 2008

우리가 아파하는 것, 혹은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은 정말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너무나도 슬픈 일이 있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중 급한 일이 생겼다고 치자. 그런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냉철하게 생각을 펼칠 수 있겠는가. 필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한다(혹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머리'는 정말로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지금까지 부수적이며 즉흥적이고 비역사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감정'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에 관한 책들 중에서 몇 권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감정에 대한 철학사적 요약: 장 메종뇌브, <감정> (한길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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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메종뇌브의 <감정> 겉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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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출판계에서는 비교적 일찍(?) 소개된 이 책은 프랑스에서의 최초 출판연도가 1948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국에서 번역 소개된 때는 그로부터 약 50년 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9년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의 번역된 시기 그 자체가 '감정'의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뒤떨어진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일찍 집필된 이 책은 주로 우리가 '감정'을 어떻게 인식하여 왔는가에 대해 살피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인간의 사유나 행동을 '머리'와 '가슴'으로 양분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접근 방식자체가 매우 아이러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제목이 드러내는 바처럼 감정에 대해 살피고 있으면서도 저자는 감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다. 이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라 믿는 저자의 평소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감정'에 대해 말하면서도 감정 그 자체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다기보다는, 철학 혹은 철학사에서 감정을 어떻게 인식하여 왔는가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감정이란 용어는 17세기 데카르트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 철학에 나타난다"(13쪽)고 하는데, 그는 그 이후의 철학사 흐름을 뒤쫓아 그 동안 감정이 어떻게 인식되어 왔고, 어떻게 평가받아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의 감정을 '슬픔과 기쁨', '사랑', '증오', '불안과 번민', 그리고 '희망' 등 의미 있는 분류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2. 마음은 어디로 진화해야하는가: 딜런 에반스, <감정> (이소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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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런 에반스의 <감정> 겉표지
ⓒ 이소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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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책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는 경우가 있다. 대개 저자에 대한 평소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딜런 에반스의 <감정>도 그러한 책 중의 하나이다. 딜런 에반스는 감정 진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라깡 정신분석 사전>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라깡을 위시한 정신분석과 철학 분야에서 보여준 해설의 솜씨를 이 책에서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은 '감정의 과학으로 가는 가장 사랑스런 지름길'이라는 부제가 잘 명시하는 바와 같이,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가야할 길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의 감정이 위치한 영역을 구분해내는 솜씨는 명쾌한데 그는 그러한 구분을 통해 "마음에는 근거가 있다"라는 하나의 명제를 결론으로 도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매력적인 사람을 유혹하게 하는 것에서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키고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감정이 하는 모든 일에는 근거가 있으며 매우 좋은 근거가 있을 때도 있다. 이성 안에는 열정이 있고 열정 안에는 근거(이성)가 있다."(188-189쪽)

즉 그는 감정이 충만할 때에 우리는 더 지적이며, 더 이성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감정의 영역이 결코 부수적이고 부차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이 때론 과격한 면도 없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에게도 감정을 줘야 하는 이유는 뭘까?'라거나 '기계가 스스로 감정을 진화시키면 어떻게 될까?'라는 그의 물음은 너무 앞서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영역을 비과학의 영역이 아닌 과학의 영역으로 정착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작은 주목할 만하다.

3. 감정을 몸의 언어로 파악하다: 게리 주커브, <감정을 과학한다> (이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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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을 과학한다> 겉표지
ⓒ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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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권의 책에 대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정말 감정은 우리에게 부차적이지 않은가, 우리에게 좀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또렷한 인식이 아닌지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을 게리 주커브의 <감정을 과학한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만 보면 이 책은 딜런 에반스의 <감정>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이 책에서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부분은 감정의 '기원'과 '출구'이다.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을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 감정의 자각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힘을 창조하는 이들은 감정을 어떻게 자각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육체 감각이 어느 위치에서 나타나는지를 주시한다. 그들은 오른쪽 어깨의 긴장감, 위 부근의 통증, 가슴의 묵직함 등 아랫부분의 경련 등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은 이러한 경험이 우연히 나타났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정보로 본다."(73-74쪽)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의 저자는 감정이 몸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이라 주장하고 있다. 즉, 감정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몸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감정이야말로 내 삶의 답을 알고 있는 증인이라 주장한다. 즉, 무기력 행복 고통 등이야말로 내 삶을 가장 잘 아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감정을 치부해서는 안 되지만, 또 그러한 감정에 지나치게 구속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그가 주장하는 감정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다.


고통과 동정 - 한국 근대소설과 감정의 발견

손유경 지음, 역사비평사(2008)


태그:#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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