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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바라본 반계서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유형원 선생(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
▲ 반계서당 마을에서 바라본 반계서당.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유형원 선생(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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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7번지. 부안에서 곰소를 항해 30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우측 산 중턱에 고택이 한 동 보인다. 우동리로 접어들면 길가에 '반계선생 유적지'란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로 진입해서 들어가면 '반계서당'이라는 안내판이 길에 서있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저 멀리 서해 끄트머리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집이 있다.

야인으로 삶을 마감한 반계선생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유형원 선생(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반계'라는 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유형원 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 한양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효종4년인 1653년 선대의 자취가 남아있는 변산반도 기슭의 이곳 우반동으로 이주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반계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기도 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다. 선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데 학문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선생의 영향을 받았으며, 반계서당에 오른 선생은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 스물여섯 권을 저술하였다.

담을 쌇았는데, 누마루에서 앞을 바라보는 것을 막지 않았다.
▲ 돌담 담을 쌇았는데, 누마루에서 앞을 바라보는 것을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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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칸의 반계서당은 고졸한 선생의 마음과 닮아

반계서당을 찾아 길을 오른다. 흙길인 산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르다가 보면,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반계서당'이라는 푯말이 있다. 조금 걸어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저만큼 물이 빠진 서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른 봄날인데도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틀을 강행군 한 덕분에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는가 보다.

몇 번인가 길을 돌아 천천히 오르다 보니, 저만큼 산 중턱에 반계서당이 보인다. 돌담을 쌓고 일각문을 내었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 돌길을 깔았다. 위로 오르면 서당 앞에 두 개나 되는 안내판이 서있다. 일각문 안으로 들어가니 좌측에 네 칸 서당이 있고, 일각문 앞쪽으로는 샘이 보인다.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부터 돌로 길을 깔아 놓았다
▲ 돌길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부터 돌로 길을 깔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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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문을 들어서면 샘이 보인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샘이 솟을까?
▲ 샘 일각문을 들어서면 샘이 보인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샘이 솟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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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는 맑은 물이 차 있어 갈증도 나던 차라, 검불만 떠 있지 않다면 한 모금 마시고 싶다. 선뜻 그러지 못하는 바보스러움을 탓한다. 이렇게 스스로 가리는 것이 많아서 어찌 자연을 닮아 살 수가 있을까? 선생은 어떻게 이 산 위에 샘이 나는 것을 알았을까?

정면으로 보면 네 칸인 반계서당.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이렇게 산 중턱에 서당을 짓고 선생은 여생을 이곳에서 학문에만 몰두 하셨단다. 서당의 정면을 바라보고 좌우측의 한 칸씩은 마루방을 내고,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다. 좌측 마루방 한 칸 앞쪽은 누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렀다. 툇마루 앞에는 네모난 기둥을 써서 마감을 하였다. 말 그대로 야인으로 생을 마감한 선생의 고졸함이 배어있는 서당이다.

네 칸 중 좌측 한 칸은 앞에 누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이보다 좋은 정자도 흔치 않다.
▲ 누마루 네 칸 중 좌측 한 칸은 앞에 누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이보다 좋은 정자도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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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가 산 중턱에 서당을 지은 까닭은?

누마루에 앉아 깊은 호흡을 해본다. 낮은 돌담은 누마루에 앉아 앞으로 펼쳐지는 정경을 막지 않아 좋다. 뒷담도 모두 돌담으로 둘러놓았다. 굳이 돌담으로 서당 주변을 두른 것은 선생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해서였을까? 가운데 온돌 방문을 열어보니, 반계선생의 영정인 듯 사진이 놓여있고, 잔과 촛대, 향로 등이 있다. 목례를 해 무례함을 사과드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여름이면 누마루에 오르고, 겨울이면 이 온돌에서 주변의 나무 삭정이와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지핀 것일까?         

온돌방 안에는 선생의 영정과 촛대 등이 놓여있다
▲ 온돌방 온돌방 안에는 선생의 영정과 촛대 등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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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편 끝으로는 마루방을 드렸다.
▲ 마루방 양 편 끝으로는 마루방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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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을 안다고 했던가? 스스로 야인이 되어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선생의 마음이었을까? 이 오르기도 힘든 산 중턱에 집을 짓고, 독야청청한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속세에 찌든 사람이 어찌 선생의 마음을 터럭만큼이나마 이해를 할 것인가? 괜스레 선생의 깨끗함에 잡티를 묻힌 것은 아닐까. 돌아 나오는 길에 밑을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논과 밭을 보면서 농촌이 부유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셨을까? 반계서당에 오르니 그 마음이 조금은 전해지는 듯도 하다.

스스로 야인이 되어 반계서당에 오른 선생. 5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이곳에서 자연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반계서당을 떠나면서 선생의 마음 한 조각을 담아간다. 이상적 세상을 건설하려는 작은 마음 한 구석을 적셔본다.

누마루에 올라 내려다 본 정경
▲ 정경 누마루에 올라 내려다 본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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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계서당, #유형원, #부안, #기념물, #우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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