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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지나친 우월감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형한다면 열등감은 은밀한 살인을 꿈꾸게 한다. 중요한 것은 자긍심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일차원적 자만심이 아니라 '나는 무엇무엇을 할 수도 있다' 하는 보다 심원한 자긍심을 갖도록 옆에서 조금 도와주는 것, 기성세대가 신흥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고창 행복원을 이끌어 나가는 강선자(67) 원장의 운영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마 이쯤 되는 것 같다.

 

지난 3월 3일,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갔을 때 강 원장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두터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른 모습을 보고 나는 어디 편찮으신가, 생각했다. 그러나 안색이며 태도에서 불편한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필요 이상이다 싶게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밝은 표정에 목소리 또한 또렷또렷하고 정확했다.

 

한 시간쯤 지난 뒤에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내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고 있었다. 메모를 하는 손가락이 곱아 글씨가 자꾸 엇나가고 있었다. 3월의 날씨라는 것이 밖에서는 햇살이 있어서 따스하지만 실내에서는 자꾸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있는 생활관이나 도서실은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과 원장실은 정지되어 있었고, 원장실에는 아예 난방시설 자체가 안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3월 6일 다시 찾았을 때 원장은 여권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미국의 후원자로부터 초창장이 왔다. 고등학교 과정 3년차인 아이들 세 명이 대상이었다. 졸업여행 겸 문화체험으로, 해마다 있어온 프로그램이었다. 출국 예정일은 9월이었다. 비행기표를 미리 사놓으면 적지 않은 돈이 절약된다는 것을 원장은 잘 알고 있었다. 비행기표 예매와 체류기한 등을 감안하면 여권 기한이 일 년 이상이어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 년 이상은 어렵다는 담당 공무원의 통보가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정책이 바뀐 것이라면 그것을 돌파할 방법은 없는지 등등의 문제로 원장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단돈 일원이라도 아끼고 모아서 다른 일에 쓰고자 하는 원장의 그 마음은 그대로 어머니를 연상케 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거기에 있었다. 자기는 배가 고프면서도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러 버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희한한 체질을 가진 어머니들이 3월의 햇살 속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확신이 안 섰다. 3월 11일 한 번 더 찾아갔을 때, 그때 비로소 이것이다 하고 머릿속에 가득 별빛이 들어찼다.

 

가출을 겨우 옆동네로 하는 슬픔이 없도록

 

"아이들이 가끔 뛰쳐나가곤 해요. 그럴 때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지 몰라요."

"아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배신감도 클 것이고."

 

"생각해 보세요. 기왕지사 뛰쳐나갔으면 부산이나 서울이나, 울산이나 그런 멀리로 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해도, 서울이나 부산 정도는 아주 낯선 곳이 아니니까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뛰쳐나가서 겨우 간다는 게 정읍이나 익산이고, 기껏 멀리까지 간다고 해봐야 전주 아니면 군산, 광주란 말이에요. 겨우 거기까지밖에 못 가는가. 우리 애들의 배포가 그 정도뿐이더란 말인가. 이런 자괴감이 너무도 처절하게 내 가슴을 치는 거예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일한 상식을 일거에 그러나 조용한 목소리로 무너뜨리는 원장의 발언에 내 공부가 너무도 짧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더불어 내 소년기의 가출이 떠올랐다. 12살, 그 해에 나는 아버지의 주머니를 털어 버스를 타고 광주를 갔다. 그리고 육 개월 뒤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귀향했다. 내가 그때 만일 광주가 아닌 더 멀리 부산이나 제주도까지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이 만약에 아주 멀리까지 가서 다시 안 돌아온다면, 그러면 원장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야 물론, 편하지는 않겠지요. 그럼요.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아니잖아요? 아이들 자신의 미래가 중요한 거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고아원이 싫다고, 지겹다고 뛰쳐나간 녀석들이 오십 리 안쪽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결국 그 안에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 아니겠어요.

 

반면에 오백 리나 천 리쯤 훌쩍 가버릴 수 있는 아이들은 뭐랄까요, 최소한 눈앞에 두고도 못 보는 청맹과니는 되지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왜 그렇잖아요. 작은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눈앞에 큰 것이 있어도 못 보고, 자기가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그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단 말이거든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가 자기를 알 수가 없게 되고, 그래서 사람이 자꾸자꾸 작아지고, 작아지다 보니 작은 일도 아주 큰일처럼 착각하고 덤비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원장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지날 시절 고아원이나 보육원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그 얼마나 험악했던가. 요즘말로 치자면 혐오시설이었다. 왜 그런 인식이 확산되었던가.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난폭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이 왜 그렇게 난폭해 보였던가.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한 대를 맞아도 가정이 있는 아이들이 한 대를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정이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억울함과 아픔을 집에 돌아가서 하소연할 수 있지만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호소할 데가 많지 않다. 결국은 같이 있는 아이들끼리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 방법이란 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다.

 

그것도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가서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수의 심리가 곧 열등감이다. 이 열등감이 외부의 눈으로 볼 때 포악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사실은 풀처럼 여리고 한없이 안타까운 자격지심뿐인데, 그것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난폭하다고 쉽게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그런 인식을 고치겠다고 나설 수야 없지 않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의 그런 열등감을, 자격지심을 가능한 한 최소화시켜 주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느낀다면 가슴도 그만큼 넓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이면 많은 아이들에게 많은 여행의 기회를 주고자 하고, 외국여행은 퇴소하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보내고자 노력을 한다.

 

작은 것을 모아서 크게 쓴다

 

"그렇게 매년 외국여행을 보내자면 그에 따르는 경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야 물론, 그렇지요. 김대중씨가 대통령 되면서부터 정부 지원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여행경비까지 예산에 잡아주는 일은 없으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해요. 보육원 애들에게 외국여행이 가당키나 하냐고. 사실은 이런 데 있으니까 더더욱 그런 기회가 필요한 건데 말이에요. 그렇다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고, 아무튼 경비는 자체적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내 주머니를 뒤지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고, 결국은 일반 후원금을 만원씩 이만 원씩 알뜰살뜰 모아서 쓰는 거예요. 보통 가정의 살림살이와 똑같은 거죠."

 

"아, 그래서 원장실에는 난방도 되지 않는 거였군요?"

"아이고, 아니에요. 절대로 그건 아니에요. 혹시라도 그런 소문은 내지 마세요. 저는 원래 그렇게 살아 왔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단련이 되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니까, 그렇잖아요. 겨울은 추우니까 겨울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옷도 좀 두텁게 입고, 양말도 겹으로 신고, 밖에 나갈 때는 귀마개도 하고, 그러는 것인데 얇은 옷 입고 좋지도 않은 몸 자랑 할 일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아이들 생활관이나 도서실은 난방이 되고 있던데요?"

"그것도 사실은 그래요. 한편 생각하면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요새 아이들이 참을성 면에서, 뭐랄까, 그래요. 우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요.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너희들 참을성 길러라. 추운 데서도 살아보고 해라, 그렇게 할 수는 또 없단 말이거든요. 내가 내 개인집에서 내 새끼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했었고요.

 

그런데 우리 이, 이 아이들은 다르단 말이거든요. 다를 수밖에 없단 말이거든요. 내가 아무리 내 아들이라고, 내 딸이라고, 내 친자식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단 말이거든요. 게다가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지 어른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른이라면 미루어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위치와 밖에 다른 아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비교를 하게 된단 말이거든요. 비교하다가 자신의 형편과 밖에 다른 아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되면 그 순간부터 무너져요.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면 잡아주기가 아주 어려워져요. 이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도 물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볼 수 있다면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이런 것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잠 재우고,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거지요.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지요.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아침에도 외롭고 저녁에도 외롭고 늘 외롭기만 한 아이들에게는 강한 목적의식 같은 거, 이런 것 주입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게 우리가 경험에서 얻은 진리라고나 할까, 그래요. 옛날에,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원장직을 수행하고 계실 적에 그런 일이 참 많았어요. 군청이라든가, 그런저런 관계기관 사람들이 말이지요. 충고도 하고 권고도 하고, 여러 형식으로 만류를 했었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자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이러느냐고, 이러지 말라고.

 

어머니의 운영철학이 입소한 아이들은 무조건 고등학교까지 진학을 시킨다는 것이었거든요. 대학은 성적이나 적성 등 조건을 무시할 수 없지만 고등학교까지는 조건 같은 것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보낸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적당히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재우고 그러다가 나이 차면 내보내라는 거였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머니의 머릿속 귀퉁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굳이 원장 노릇 할 필요는 없다, 돈 버는 기술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런 생각이셨던 거죠."

 

"도서실 시설이 저렇게 아늑하고 방음까지 완벽한 게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로군요."

"우연이라니요. 사십 년이 걸린 일이에요. 책과 저희 어머니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고나 할까,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단 말이에요. 그때마다 답례를 하는데 그게 책이었어요. 사람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잖아요. 여러 가지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저희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그랬어요. 책을 읽는 순간은 오늘을 살면서도 내일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오늘과 내일을 동시에 사는 것이 독서라는 그런 뜻인 거죠. 어떤 분은 도서실을 둘러보고 면학 분위기가 아주 잘 돼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는데, 사실은 아니에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등을 하라는 뜻은 도서실 어디에도 담겨 있지 않아요. 학교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얼마든지 있다는 거죠." 

 

강 원장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멈추고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그 당시만 해도 어머니의 사업이 날로 번창해서 결재일이면 손수레로 돈을 싣고 다녀야 할 정도였지만 어머니도 딸도 대학은 생각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손수레로 싣고 다녀야 할 정도로 벌리는 돈을 어머니는 행복원에 쏟아 부었고, 딸은 행복원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함께 독서를 하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가장 슬프고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은?

 

그렇게 행복원은 강 원장의 안방이며 놀이터이며 일터이자 친정이 되어갔다. 결혼을 한 뒤에도 어머니가 힘들 때면 달려왔고, 어머니가 쓰러진 뒤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원장직을 이어받았다. 당시만 해도 정부 지원이란 아주 미미하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원장 자신에게 돈이 있어야 했다. 밑 없는 독에 물을 채우듯이 무한대로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이는 관리책임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어머니의 혼과 정성과 청춘과 생애 전체가 고스란히 담긴 행복원을 위태롭게 방치할 수는 없다는 의지와 자신감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의지와 자신감을 밑천으로 그는 목록을 작성해 나갔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여고 동창이며 옛 친구, 선배 후배 등등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많이도 필요 없다. 매달 오천 원씩만, 아니면 일만 원씩만 정기적으로 보내다오.

 

가장 슬펐던 일, 혹은 안타까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질문에도 원장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나이가 찬 원생이 퇴소할 때 육백 내지 칠백 만원을 들려준단다. 일대일 매칭 후원금 적립한 것과 정부 지원금 등을 합한 것으로, 일종의 독립자금인 셈이었다. 대학에 진학을 하든 취업을 하든 어쨌든 기본이 있어야 하니까 그 기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많지도 않은 독립자금을 친부모가 나타나서 가로채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가장 슬프고, 안타깝고, 그리고 화도 나지요. 친부모인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우리의 사회구조가, 그런 흐름이 때로는 화도 나고, 눈물나게 안타까운 거죠."


태그:#고창 행복원, #강선자, #운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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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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