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소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종학당.
▲ 종학당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소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종학당.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는 윤순거가 지은 '종학당(宗學堂)'이 있다. 말 그대로 파평 윤씨 종중이나 문중, 내외 처가까지의 자녀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정자와 같은 형태로 짓는 당은 마루와 방을 곁들인 장소이다. 종학당은 조선조 인조 21년인 1643년 처음으로 지어졌다. 윤순거는 종학당이라는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이 집을 짓고 난 뒤, 종약을 제정하였기 때문이다.   

절경에 자리 잡은 종학당

충남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종학당 앞으로는 병사저수지가 자리를 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낮은 산이 있어, 흐르는 물은 아니라고 해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아마 이 곳에 종학당을 지을 때,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나 보다. 이 종학당은 화재로 전소가 되었던 것을, 1790년 윤순거의 5대손인 윤정규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종학당에서는 일반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를 정해, 교육과정이 달랐다고 한다. 서원 등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치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니, 나름 종중에 맞는 교육정책을 펼친 것 같다. 종학당의 학습은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운영되다가, 그 이후 신교육제도의 도입으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1985년에는 파평 윤씨 종중에서 종학 활동을 추진하여, 1988년에는 새로운 종학 강당을 설립하였다.

종학당의 대청 뒤편에 걸려있는 종학당의 현판
▲ 현판 종학당의 대청 뒤편에 걸려있는 종학당의 현판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낮은 담을 둘러 쌓고 일각문을 낸 종학당. 퍄평 윤씨 자녀들의 강학을 위해 지은 집이다.
▲ 종학당 낮은 담을 둘러 쌓고 일각문을 낸 종학당. 퍄평 윤씨 자녀들의 강학을 위해 지은 집이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아이들 생각을 먼저 한 종학당

종학당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었다. 중앙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을 겸한 통간마루를 설치하였고, 양쪽 한 칸씩은 방을 설치한 팔작 건물이다. 이 종학당은 가운데 통간마루 뒤편에 두 곳의 판자문을 내고, 양 편에 방은 반 칸을 뒤로 물려 앞으로 높임마루를 놓았다. 높임 마루 밑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형태로 지어진 것을 보아 종학당은 일 년 년 중 계속해서 강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종학당의 뒤로 돌아가면 축대 위에 세운 굴뚝을 볼 수 있다. 연도는 땅으로 깊이 묻었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건물과 멀리 떨어져 높게 앉은 굴뚝. 왜 이렇게 만든 것일까?

두 칸 통마루로 놓은 종학당 대청. 뒤편에는 두 곳의 판자문을 내었다.
▲ 대청 두 칸 통마루로 놓은 종학당 대청. 뒤편에는 두 곳의 판자문을 내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두 칸 대청의 양편에는 한 칸 온돌방을 마련하였다.
▲ 방 두 칸 대청의 양편에는 한 칸 온돌방을 마련하였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낮은 담을 전각 주위에 두르고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한 종학당. 뒤편에는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양편의 방에서 나온 굴뚝을 올렸다. 그리고 몇 그루의 묵은 배롱나무들이 서 있다. 이 굴뚝이 이렇게 건물과 떨어져 있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해서이다. 즉 연도를 따라 뿜어 나오는 연기가 건물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기는 위로 오른다. 높지 않은 굴뚝을 축대 위에 놓은 것은, 미적인 면도 생각하게 하지만 연기가 배우는 아이들에게 닿지 않도록 함이다. 건물을 지으면서도 아이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깊이 있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윤순거의 마음이다.

연도를 땅에 묻고 뒤편에 축대를 쌓아 올린 굴뚝
▲ 굴뚝 연도를 땅에 묻고 뒤편에 축대를 쌓아 올린 굴뚝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윤순거

윤순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태어나, 현종 9년인 16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대사간 황이다. 큰 아버지에게 입양이 되어 인조 11년인 163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에 임명이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윤순거가 종학당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강학을 한 것은, 주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636년 부친이 사간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일로 인해 영동으로 부친이 유배되고, 숙부인 유전은 강화도에서 순절을 하였다.   

이 일로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이 종학당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윤순거는  외삼촌인 성문준에게 학문을 배우고, 강항에게서는 시를, 김장생에게는 예학을 배웠다. 후에 벼슬에 나아갔는데, 현종 1년인 1660년 영월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노릉 등 단종의 유적을 수리하였다. 더불어 <노릉지>를 수찬하는 등 단종의 위호추복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윤순거이기에 아이들을 위해 종학당을 세우면서도, 세심한 것 까지 신경을 썼을 것이다.
    
양편 방은 마루쪽은 네짝 창호를 내고, 정면으로는 두짝 창호를 내었다.
▲ 방 양편 방은 마루쪽은 네짝 창호를 내고, 정면으로는 두짝 창호를 내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단조로운 건물이지만 그 안에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종학당. 마루에 올라 앞을 내다보니, 병사저수지의 물이 너무도 파랗다는 생각이다. 황사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기는 하지만, 윤순거의 마음이 되어 바라본다. 그 안에서 자연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뒤편 배롱나무에 연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 다시 한 번 찾아 진정한 봄을 느껴보고 싶다.


태그:#종학당, #윤순거, #병사리, #논산, #유형문화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