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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아홉 날을 보내고 교토로 '이사'를 했다. 언제나 깊이 가 닿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잔정만 넘쳐 겨우 아흐레 머문 타국의 동네를 떠나는 데도 적잖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만큼이면 됐다' 싶은 마음도 들어 결국 예상보다 이틀 늦게 교토로 떠나왔다.

굳이 이사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본인이 일본을(어디든간에) 방문한 목적이 여행이나 더더욱 관광이라기보단 '그저 살아보자'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속깊은 얘기는 차차 하고 오늘은 행여나, 기어이 저질러보고 말겠다 하는 나와 같은 '용감무쌍 속수무책' 자전거족들을 위해 오사카에서 교토까지의 여정을 소개하려 한다. 매우 긴 여정이니 쉼호흡부터!

<오사카 ↔ 교토 왕복 90킬로미터>

이사 준비 완료. 물통과 우산, 헬맷은 필수!
 이사 준비 완료. 물통과 우산, 헬맷은 필수!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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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찌감치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마쳤다. 등짐까지 합쳐 배낭 2개, 물통과 우산, 헬맷은 필수다. 행여 숙소에 놓고 온 게 없는 지 점검 또 점검. 중요한 물건이라도 빠트리는 날엔 돈 낭비는 물론 이래저래 고생을 자초하게 된다.

사진 속 자전거가 이번 여정을 함께 하고 있는 나의 애마다. 한국 토종 브랜드 '삼천리'의 2010년형 스파크DX, 26인치 21단 변속, 앞뒤 쇼바(shock absorber의 줄임말) 장착 모델이다. 

실은 지난 가을쯤 한창 몸에 익은 자전거를 도난당한 후 새로 사기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모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녀석의 저렴한 몸값과 가격대비 그럴싸해 보이는 외양에 끌려 출발 불과 사흘 전 급히 구매했다.

그런데 다소 과한 무게에도 업힐시 주행감이 부드럽고 경쾌한데다, 무엇보다 만나는 현지인들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느 회사 거냐" 물어보니 "한국 자전거다"라고 답할 때 마음이 은근 뿌듯하다. 하지만 이 대견한 녀석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 말미에서 알려주겠다.

등교하고 있는 일본의 여학생들
 등교하고 있는 일본의 여학생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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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노지 광장에서 교토로 방향을 잡고 달린 지 10여 분쯤, 골목길에서 만난 일본의 여학생들이다. 3월이지만 아직 차가운 날씨에 두툼하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도 보인다. 어쩌다 일본 여학생 하면 팬티를 겨우 가린 짧은 치마에 리본 달린 세라복을 연상하게 됐는데 직접 가서 보니 '세일러문'에서처럼 아찔한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텐도지마에유히가오카역 근처서 본 사찰
 사텐도지마에유히가오카역 근처서 본 사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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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시와 시 이동거리만 45km. 저녁 전에 도착하기 위해선 쉼없이 달려야겠지만 띄엄띄엄 길목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사찰이나 신사들이 발길을 붙들었다.

이곳은 무심히 골목길을 달리던 중 발견한 사찰이다. 이슬비가 내리는 아침, 고즈넉한 경내 분위기에 이끌려 잠시 머물고는 교토까지 가는 길 무사안녕을 빌고 나왔다.

일본식 소고기 덮반 체인점인 YOSHINOYA에 먹은 아침
 일본식 소고기 덮반 체인점인 YOSHINOYA에 먹은 아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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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쯤, 달린 지 한 시간 남짓한데 벌써부터 다리가 결리고 몸에 힘이 없다. 아무래도 아침을 거른 탓이지 싶어 사쿠라노미야역 근처 YOSHINOYA란 소고기 덮밥 체인점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웬만한 메뉴는 500엔대로 고기와 생선 반찬을 먹을 수 있어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인기인 곳이다.

도로 공사현장 주변에서 질서 정리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
 도로 공사현장 주변에서 질서 정리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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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배도 부르니 다시 달려볼까. 그 전에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센스! 식당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아저씨인데 일본에선 공사현장이나 주차장, 인파가 많은 시내 곳곳에서 이런 안전요원들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노인들인데 길눈 어두운 이방인에겐 매우 고마운 분들이다.

자전거나 도보 여행을 할 때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길을 잃거나 헷갈릴 때 혼자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 근처 보이는 현지인에게 직접 묻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다. 대중교통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은 갸우뚱 하는 길도 노인들은 그림을 그리듯 찬찬히 상세하게 알려준다.

미야코지마역 근처서 한식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재일동포 3세 분.
 미야코지마역 근처서 한식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재일동포 3세 분.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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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길 확인을 위해 우연히 들른 가게. 갖가지 한식 사진과 한국어로 표기한 음식 이름들이 눈에 띄어 아주머니께 "한국 분이세요" 했더니 "재일동포 3세"라 했다.

고단한 삶의 그림자가 옅은 물결처럼 퍼진 얼굴에 소박한 미소를 지닌 분이셨는데, 헤어지기 전 "집 나와 고생한다"며 초콜릿을 한 주먹 쥐어주셨다. 주머니를 볼록하게 채운 초콜릿 덕분에 이날 여정이 덜 피로했다.

교토 남은 거리 42km
 교토 남은 거리 42km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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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도로 진입. 교토까지 남은 거리 42km. 문득 걱정스럽기는커녕 '할 만 한데' 하는 자신감이 치솟았다. 

"그래, 하루 10시간 잡아먹을 듯 달리는 트럭들 옆에서 먼지 한사발 마셔봐야 아~~ 집 나오면 X고생이구나, 버스나 지하철이 겁나게 빠르구나, 알게 될 거야."

'개콘' 유명환 버전의 개그를홀로 중얼거리며 실실 웃는데 스스로도 '제 정신인가' 싶었다.

요즘 일본서 최고 인기몰이 중이라는 아유미 씨.
 요즘 일본서 최고 인기몰이 중이라는 아유미 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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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지마였던가, 시내 한가운데서 만난 낯익은 아유미씨의 사진이 반갑다. 요즘 국내 한 축구선수와의 열애에다, 현지에서 성공적인 가수 데뷔로 인기몰이 중이라는데, 지금과는 너무 달랐던 한국에서의 활동 모습이 안타깝게 기억된다.

이름은 보아인데 사진은 송혜교?
 이름은 보아인데 사진은 송혜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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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미에 이어 후미진 골목길 안쪽으로 보이는 또다른 간판. 역시나 반갑다 하는 차에, 자세히 보니 이름은 영문으로 BOA라 돼 있는데 옆에 사진은 배우 송혜교씨 얼굴이다. 게다가 '072-898-0277' 저 번호를 가진 장소는 보나마나 개운치 못한 곳인 듯.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한류 열풍과 함께 음지에서의 저작권과 초상권 침해가 남발한다더니 그 현장을 딱 잡았다. 송혜교나 보아씨 소속사 연락처는 모르겠고, 072로 시작되는 저 곳에 전화를 해서 항의를 해야 하나 싶은데 현지말을 모르니 역시나 '무식이 죄요, 설움이 싫으면 배워야 한다'는 어느 계몽가의 말이 맞는 것이다.

오사카에서 교토 가는 길에서 가장 난감했던 곳.
 오사카에서 교토 가는 길에서 가장 난감했던 곳.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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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남은 거리 31km 지점 에서 만난 이날 여정 중 가장 험난했던 구간. 이런 길이 꽤나 오래 계속됐는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트럭들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자전거 여행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에게 절대 무작정 덤비지 말 것과 안전장비 착용을 강조하는 것이 이런 이유다.

국도에서 만난 일본 경찰들
 국도에서 만난 일본 경찰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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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시간이 끝나고 비교적 한산한 도로로 들어섰을 때, '이쯤에서 쉬고 내일 갈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아졌다. 그래서 길가에서 만난 경찰들에게 말을 물었는데 한참만에 나온 결론은 "근처엔 모두 러브호텔 뿐이며, 교토역 근처에 가야 원하는 숙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거였다.

과장이 아니고 이때 정말 울 뻔 했다.

'교토 17km'라는 이정표 옆 주유소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르키고 있다.
 '교토 17km'라는 이정표 옆 주유소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르키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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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가? 멀리 왼편에 '교토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이고 그 건너편에 주유소 앞 시계가 오후 4시 5분을 가르키고 있다. 오전 9시 신이마미야역 출발, 여기까지 7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남았으니 힘을 내야 한다.

드디어 교토시 진입.
 드디어 교토시 진입.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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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교토시 진입!

"후, 하, 후, 하아..."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서 올 때 로밍도 안 한 휴대전화를 시계 한답시고 가져오는 또 하나의 무지의 소치를 저지른 바 여정 내내 해시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그런데 이것이 그닥 불편하지 않았다).

어스름의 기운이 감도는 먼지 가득한 이국의 국도 한 점에서 물끄러미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 길이 내게 무슨 의미인가'

아무리 맘대로 떠나 무작정 살다오겠다 했지만 이따금씩 이러한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리를 채운다.

어느새 하늘의 구름 사이로 노을이 번지고 있다.
 어느새 하늘의 구름 사이로 노을이 번지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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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찾아 교토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하늘의 구름 사이로 서서히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해가 지기 전 도착해서 다행이다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무려 2시간여에 걸쳐 길 찾기가 이어졌다. 현지인과 현지에 산다는 한국인 여럿에게 길을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됐다.

교토에서 여장을 풀게 된 게스트하우스
 교토에서 여장을 풀게 된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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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일본인인 줄 알고 말을 건 한 한국인 청년과 "집에 가면 발 닦고 잘 일 밖에 없다"며 과하게 친절을 베풀어준 일본인 한 아저씨 덕분에 어렵사리 적당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완벽한 어둠이 깔린 뒤였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며 시계를 봤을 때 밤 9시였던 듯 싶다. 딱 하루의 반에 걸친 이사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숨이 차다. 참, 서두에서 언급했던 내 애마의 치명적인 단점이란 바로 일본에서는 '접이식 자전거'가 아니면 지하철도 버스도 탈 수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본인은 이날의 여정을 정확히 일주일 뒤, 그러니까 교토에서 오사카로 또한번 반복하게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 외엔 위안할 길이 없었다. 자, 자전거로 오사카에서 교토 이사하기 여정은 여기까지, 교토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겠다.


태그:#일본,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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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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