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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둠에 깊이 묻혀 있는 오전 4시. 들러붙는 잠을 털어내고 서둘러 준비해 5시 30분에 집에서 출발한다. 어두운 길을 더듬어 함안 가까이 가니 여명이 보인다. 멀리 해남 땅 끝까지 가는 여정이다. 차 창밖으로 희미하게 사물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보성 녹차밭, 월출산, 땅 끝 마을, 천관산, 내장산, 순천만, 여수 영취산, 해남 보해 매실농원, 제암산 등등 전라도엔 가 볼 곳도 많은 것 같다.

 

한적한 도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거침없이 달린다. 보성을 벗어나 강진을 거쳐 해남으로 접어들고 미끄럽고 경사진 길로 이어진다. 해남읍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10분, 새벽 일찍 나왔건만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해남에 도착한다. 

 

유선관을 아시나요

 
 

두륜산 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왼쪽으로 빠지면 벚꽃나무길이 이어진다.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 가는 길은 아기자기하고 시골 운치가 느껴진다. 두륜산 도립공원으로 들어서면 공원 앞에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는데, 다닥다닥 붙어 앉은 음식점들은 밖에서 보아도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매표소 앞에서 관람료(1인당 2500원)를 낸다. 매표소에서 안쪽으로 2km 쯤 더 가면 등산로 표시판이 나온다. 시멘트로 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계곡 물소리가 흐른다. 대흥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신발 끈을 새로 묶은 뒤 배낭을 등에 지고 간다. 대흥사를 지나면 등산로가 등장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산책로 양쪽에 서서 숲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동백나무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동백나무 아래에는 떨어져 누운 붉은 동백꽃들이 지천이다. 잘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니 유선여관(유선관)이 보인다. 계곡물 흘러내리는 다리 옆에 위치한 한옥집인데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여관을 새로 손을 본 것 같다.

 

대문이 열려져 있어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고풍스런 멋이 느껴지는 유선관 숙소는 방마다 제각기 다른 이름을 적어놓고 있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는 정원에 나무들이 울창하다. 정원을 지나 안쪽으로 가보았다. 장독대에는 장독이 가득한데 하나 같이 윤기 있게 반짝거린다. 장독 뒤로 굽어 들어가면 동백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동백꽃이 송이채 떨어져 선연한 핏빛으로 흥건하다.

 

동백나무 뒤에는 콸콸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계류가 있다. 장장 2km에 이르는 계곡물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며 흘러가는 것이리라. 계곡 바짝 뒤에는 산으로 이어진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여기서 하룻밤쯤 묵고 가도 좋을 것 같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에 마음도 씻고 생각도 씻기 좋겠다. 유선관을 잠시 둘러보고 계곡 물소리를 따라 올라간다.

 

두륜산 등반길

 

11시 30분. 대흥사 경내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티가 난다. 잘 만들어진 산책로,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숲과 길게 이어지는 밝은 계곡 물소리가 환하다. 대흥사를 대충 둘러보고 식수 터에서 약수를 받아 북암 방향으로 간다. 등산로는 코스가 몇 개 되는 듯 하다. 바위돌길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간다.

 

길 따라 가면서 물소리는 점점 잦아들다 끊어지고 경사가 점점 높아지는 돌 섞인 흙길이 나타난다. 갈수록 높아지는 길.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차오른다.

 

헉헉대며 오르막길을 넘어서면 북미륵암 앞 삼거리이다. 여기서는 대웅전, 가련봉, 오심재, 두륜봉, 천년수 방향으로 가는 세 갈래길이 나있다. 북미륵암을 지나 눈이 녹아내려서 질퍽거리고 젖은 길을 계속 간다.

 

 

흙길과 바위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마지막 흙길을 끝으로 도착한 넓은 공터 오심재에는 환한 봄 햇살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곳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한쪽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시 휴식 후 노승봉을 향해 좁은 비탈길을 따라 올라간다. 잔설이 녹은 길은 질퍽거리고 미끄럽다. 노승봉이 저 앞에 마주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뒤로 쭉 가련봉(703m)이, 두륜봉이 차례로 펼쳐져 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전라도의 산들을 멀리 조망하며 바라볼 때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이다. 전라도의 거의 모든 산들은 높은 암봉으로 치솟아 위협적이고 도발적으로 우뚝우뚝 솟아 있다. 오심재에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올라가다보니 헬기장이 나온다. 바로 위엔 노승봉 바위 봉우리가 불끈불끈 솟아 있다.

 

오후 1시 5분. 헬기장 공터엔 한낮의 봄 햇살이 따사로워 바위에 앉아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고계봉이 저만치 마주 보인다. 고계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전망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멀리 보인다.

 

무리한 산행은 금물, 안전이 최고

 

 

조용한 헬기장 공터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는다. 이럴 때 먹는 사과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이제 다시 노승봉을 향해 힘을 낸다. 헬기장 앞은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으로 가는 길과 오심재, 미륵암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건 또 뭔가. 노승봉 정상 바위 우뚝한 턱 밑까지 왔건만 고개 들어 바라보는 높은 바위산은 수직 벽을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난코스다. 그동안 여러 산을 타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높은 바위 봉우리를 만나 밧줄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두 손 두 발 다 이용해 기어가다시피 해서 공룡 능선을 얼결에 넘어가기도 했고 또 웬만한 난구간도 통과했지만 이번엔 영 아니다. 몸이 올라가기를 망설인다. 내 마음도 망설여진다.

 

우리보다 먼저 온 세 사람이 올라가려 시도하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간 것을 봤기 때문일까. 새벽 일찍 일어나 긴 시간동안 차를 탔기 때문일까. 선뜻 몸도 마음도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시도해보았다. 쳐다만 봐도 아찔한 높은 벽에 매달린 밧줄 두 개, 쇠줄 하나를 양손에 나눠 쥐고 바위의 조그마한 틈에 발을 딛고 올라가본다.

 

 

조그마한 바위 틈새에 다리를 끼우고, 쇠로 된 디딤대를 짚기도 하면서 겨우 올라가는데 머리 위에 놓인 바위가 문제였다. 머리 위를 가로질러 놓인 바위, 그 바위 사이 틈으로 조심하면서 고개를 디밀고 올라가야했다. 나는 더 올라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 구멍을 무사히 통과해서 노승봉 정상에 올라간다면 위험 구간이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면 이어지는 위험 구간의 시작일 뿐이고 공룡능선처럼 위험의 연속일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차마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특공대 훈련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생명이 두 개도 아니지 않는가. 안전한 산행을 하고 싶었다. 등산을 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위험과 스릴을 경험한 일들이 참 많았다. 위험구간을 넘으면서 모르고 왔으니 망정이지 알고 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안전하게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내려온다.

 

바위를 타고 다시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다. 수직으로 된 바위벽을 겨우 더듬더듬 되짚어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겨우 땅에 발을 딛는다. 힘이 쭉 빠진다. 우회로는 없을까. 대부분의 이런 구간에는 우회로가 있는 법인데, 옆으로 가 보았다. 역시 낭떠러지다. 낭떠러지 바위에 한 개의 밧줄이 아래로 길게 내려져 있지만 그 바위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그 역시 위험천만한 길이다.

 

아래로 쳐다만 봐도 아찔하다. 올라가자니 위험하고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가자니 개운치 않고 해서 망설이며 맞은 쪽 바위 위에 앉아 있으니 산악회에서 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더니 한 사람씩 밧줄을 타고 통과한다.

 

덩달아 올라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괜히 손에 땀이 났다. 나도 다시 한 번 해볼까. 하지만 처음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곳이다. 그냥 내려가기로 한다. 겸손하고 안전하게 산행하는 것이 낫다.

 

바로 앞에 노승봉 정상을 두고 되돌아 내려가는 남편 얼굴에는 검은 먹구름이 가득하다.  앞서 가고 있는 남편한테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막무가내로 모험하려드는 남편이 야속하다. 노승봉에서부터 두륜봉까지 종주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사실 남편도 망설였던 장소였던 곳이 아닌가.

 

어쨌거나 처음 맞닥뜨린 노승봉에서부터 어려운 난관 앞에서 되돌아 내려가는 것이 여간 서운한 모양새다. 서로 조금 거리를 두고 길을 간다. 다시 내려가는 길도 질퍽거리고 미끄럽고 비탈지다. 헬기장을 지나 진흙투성이 바윗길을 내려와 오심재에서 잠시 또 쉰다. 바로 내려갈 것인가. 다른 경로로 해서 그 중에 한 봉우리라도 올라가 볼 것인가. 바로 하산하기엔 아직 시간이 많았다. 남편은 "두륜봉'이라도 가볼까?!"하고 내 의견을 물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벌떡 일어난 남편의 얼굴에서는 먹구름이 물러가고 입가에는 미소가 귀밑까지 걸린다. 북미륵암을 지나 두륜봉을 향해 가는 길에 남편은 다 죽어가는 듯 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솜사탕처럼 풀어져서 천진스런 미소를 머금고 걸음도 날아갈 듯 활기차다.

 

두륜산은 산 전체가 험한 느낌이다. 바위 너덜 길을 지나다가 앉아 쉬고 있는 등산객한테 두륜봉과 가련봉 중 어느 봉우리가 접근하기 쉬운지 물었다.

 

이쪽 방향에서 가련봉을 타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가련봉을 가려면 아까 우리가 처음 시도하려다가 포기했던 노승봉에서부터 쭉 타고 오는 것이 정석이란다. 노승봉에서 가련봉까지 계속해서 위험한 바위타기로 이어진다고 차라리 가련봉을 이쪽에서 역으로 타는 것보다 옆에 있는 두륜봉을 오르는 것이 낫다고해서 두륜봉 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노승봉에 안 올라가길 잘 한 것 같다.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무서워하면서 굳이 남들이 다 가니까, 덩달아서 강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무리하게 강행하는 데서 온다. 산은 안전하게 겸손하게 자신에게 맞게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덜바위를 따라 두륜봉으로 향한다. 오후 3시 15분, 천년수 앞에 다다랐다.

 

이곳은 수령 1200~1500년 된 느티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점점 더 올라가자 옛 만일암 터가 나온다. 만일암지 오층석탑 앞에 잠시 섰다가 갈 길이 바빠 서둘러 오른다. 힘들게 헉헉대며 계속되는 오르막 경사길이다. 만일재에 도착한다. 만일재에서 주봉인 가련봉이 왼쪽에 우뚝 솟아 있고 오른쪽엔 두륜봉이 역시 높이 우러러보인다. 만일재에서 두륜봉 쪽으로 간다.

 

응달진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은 바윗길로 이어져 위험하다. 쇠줄 난간을 잡고 길을 올라간다. 오르막길에서 숨이 턱에 닿는데 얼마쯤 가다보니 구름다리가 머리 위 높이 보인다. 하지만 몸이 많이 지쳐있다. 오늘 얼마나 걷고 있는 것일까.

 

고계봉, 가련봉 등 정상만 밟지 않았다뿐이지 이건 완전 종주다. 더 높은 경사 길을 힘겹게 올라 구름다리 밑에 선다. 구름다리란 것이 바위로 되어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철계단 바로 위에 바위가 길게 붙어 자연 바위 구름다리를 만들어놓고 있다. 신기하다.

 

두륜봉 정상에 오르니 다도해가 보이네

 

숨가쁘게 올라와서인지 구름다리 아래 철 계단에 올라서자 현기증이 난다. 철 계단을 지나 바위에 발을 딛고 올라섰다. 두륜봉 정상은 바로 옆에 있다. 정상표시석 앞에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오후 3시 45분이다. 두륜봉 표지석은 넓은 바위 위에 올려져 있다.

 

두륜봉에서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연화봉, 가련봉...등 높은 두륜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해남반도에 우뚝 솟아 있는 두륜산, 바로 앞 동쪽에는 북일면,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와 점점이 수놓은 섬들이 있다. 그 뒤편에는 우리가 올라온 대흥사가 오롯이 산자락에 감싸여 있다. 겹겹의 산들이 어깨를 겨루며 산산이 펼쳐져 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긴 시간의 수고와 힘겨움이 있었고 목숨이 위태로운 '식겁한' 경험도 했지만 막상 두륜봉 정상에 올라 앉아 두루 조망하고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어 우리 걸음도 다시 하산 길로 향해야 하지만 긴 시간동안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다. 아쉽지만 하산한다. 왔던 길은 버리고 진불암 방향으로 간다.

 

급경사 내리막 비탈길에 바위투성이 길로 한참을 이어진다. 걸음에 탄력이 붙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올라가는 길도 힘들지만 내려가는 길은 더 난해하다. 곳곳에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위협적인 바위가 길 한 가운데 치솟아 있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미끄러운 길로 이어져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더듬더듬 걸음마 연습하듯 걷는 길이다. 오후 5시 정각에 진불암에 도착한다.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시멘트 길을 따라 간다.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참 오래 걷는다. 대흥사 주차장이나 두륜산하고 점점 간격이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반가운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길은 다시 안으로 굽어들면서 대흥사 쪽으로 이어진다. 두륜산에서 멀어지는 듯 하더니 한참을 에둘러 가다가 길이 굽어지면서 대흥사로 난 옆길이 나온다. 오후 5시 35분에 대흥사에 도착한다.

 

땅거미 지고 고요한 대흥사의 늦은 오후,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여전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다리에는 단단하게 알이 배였다.

덧붙이는 글 | 산행수첩
1. 일시: 2010년 3월 13일(토). 맑음
2. 산행기점: 대흥사
3. 산행시간: 7시간 10분
4. 진행: 매표소. 두륜산 대흥사 주차장(10:40)-유선여관(10:55)-대흥사(11:05)-삼거리(북미륵암,두륜봉 갈림길/11:30)-북미륵암(12:10)-오심재(12:30)-노승봉 밑 헬기장(1:05)-노승봉 암봉 밑에서 하산(2:00)-헬기장(2:10)-오심재(2:25)-북미륵암(2:50)-너덜지대(3:05)-천년수 느티나무(3:15)-만일암지 오층석탑(3:20)-만일재(3:30)-두륜봉 정상(630m,3:45)-하사(4:15)-진불암(5:00)-대흥사(5:35)-주차장(5:50)
5.특징
①유선여관:여행객 숙소
②두륜봉 정상:가련봉(703m), 노승봉(688m), 고계봉(케이블카 타고 감:638m)
③대흥사 마당: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조망됨. 대흥사-북미륵암:급경사, 북미륵암-오심재:평탄한 길, 오심재-노승봉: 급경사
④노승봉 정상 암봉 올라가는 길:밧줄 타고 감.


태그:#두륜산, #전라도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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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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