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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지하철 오에도(大江戸)선 롯폰기(六本木)역에서 내려 거리로 나왔다. 롯폰기의 거리에는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쿄에는 여러 번 왔지만 롯폰기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가운 햇살을 뚫고 내가 목표로 하는 한 미술관을 향해 롯폰기의 거리를 걸어갔다.

미술관 가는 길은 롯폰기 구시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도로변의 크지 않은 건물들은 일본인들 특유의 청결함으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건물 외관상 지어진 지 꽤 세월이 지난 듯하지만 리모델링한 외벽들은 밝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건물들이지만 최근에 롯폰기에 들어선 세계 최신의 미학적 건물들과는 약간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신미술관 주변에는 현대적 감각을 뽐내는 건물들이 많다.
▲ 국립신미술관 입구의 건물. 신미술관 주변에는 현대적 감각을 뽐내는 건물들이 많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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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도로의 차도와 구별 짓게 하는 분리대에는 도쿄 국립신미술관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친절하게 계속 연결되는 표지판의 글자 폰트가 너무나 예뻤다. 국립신미술관이 가까워질수록 도쿄의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뽐내는 건물들이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행안내 책에는 롯폰기 역에서 국립신미술관까지 걸어서 5분이 걸린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약 10분 정도가 걸렸다. 여행 정보는 항상 현지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 진리이다. 나는 가족의 발걸음을 서둘렀다. 미술관 폐관시간이 오후 6시이고 너무 넓은 미술관이라서 차분히 관람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그늘을 따라 미술관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많이 걷지 않은 편이라서 아내와 딸의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물결치는 거대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 도쿄 국립신미술관. 물결치는 거대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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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도쿄 국립신미술관. 2007년 1월에 '숲속의 미술관'을 모토로 새롭게 문을 연 이 미술관은 '도쿄 아트 트라이앵글(Tokyo Art triangle)'에서 가장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국립미술관 주변에는 미드타운의 21-21 디자인 사이트, 산토리 미술관, 롯폰기 힐즈의 모리미술관이 함께 하고 있다. 요새 도쿄 여행 1번지로 각광받는 롯폰기에서도 국립신미술관은 미드타운과 함께 한참 뜨고 있는 새로운 명소이다.

수많은 시민들에게 개방된 미술관이다.
▲ 국립신미술관 1층. 수많은 시민들에게 개방된 미술관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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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미술관의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름다운 외관이 드러났다. 물결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곡선이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커튼 같은 미술관의 유리 외벽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무한정 반짝이고 있었다. 국립신미술관은 하나의 커다란 건축 예술품이자 도시를 디자인하는 건축물이었다.

출입구는 마치 비행접시같이 재미있는 원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늘로 치솟은 원추의 천장을 감상하면서 미술관 내부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미술관 입장과 기본 전시물 관람은 무료였다. 국립신미술관은 관람객 누구나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입구를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승용차 주차장을 아예 만들지 않고 3곳이나 되는 지하철역 사이에 이 미술관을 지은 것도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미술관의 유리벽은 상하좌우로 물결치며 햇빛을 빨아들인다.
▲ 물결치는 유리벽. 미술관의 유리벽은 상하좌우로 물결치며 햇빛을 빨아들인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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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 들어와서 보니 건물 외관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한 유리 외벽이 너무나 시원스러웠다. 롯폰기 도심 속에 유리로 만들어진 파도의 물결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 파도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의 울림같이 보이기도 했다. 회색이 잘 녹아들어 있는 프레임에 푸른빛이 도는 유리의 물결은 찬란했다. 미술관이라는 약간 딱딱한 주제와 거대한 건축물의 중압감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관은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미술관 안내도에서 이 미술관의 전시실 수를 세어 보았다. 일본 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쿄 국립신미술관의 전시실은 크고 작은 전시실을 모두 합쳐서 12개나 되었다. 자연스러운 갈색의 전시실 벽면은 물결무늬 유리벽과 대비되고 있었다. 프레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전시관 벽면은 따뜻한 목재의 느낌이 살아 있었다.

따로 미술품들을 수집하지 않는 국립신미술관은 소장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미술관에서는 소장품 전시회는 열리지 않는다. 넓고 다양한 전시실에서는 항상 대관전만이 열리는데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기획전은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장소의 변화무쌍함을 볼 수 있다.
▲ 노무라 히토시 작품전.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장소의 변화무쌍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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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보기로 한 기획전은 바로 노무라 히토시(野村 仁)의 '변화하는 상태 - 시간·장소·신체(変化する相―時・場・身体)'였다. 운 좋게도 나는 일본 유명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전시 종료 3일 전에 만났다. 나는 우선 미술관 1층의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이 기획전이 열리는 '2E' 전시실의 위치를 확인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본 미술관의 물결무늬 유리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세히 보니 유리벽은 좌우로만 물결치는 게 아니라 상하로도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위로 올라갈수록 유리벽 밖의 초록 정원이 땅 밑 세계처럼 멀리 느껴졌다. 나는 이러한 공간감을 만들어낸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黑川紀章)'의 놀라운 창조성에 박수를 보냈다.

기획전시실에 입장하면서 나는 국립신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인쇄해 온 할인권을 제시했다. 어른 입장료는 100엔씩, 총 200엔을 할인받았다. 신영이와 같은 고등학생 이하의 어린 학생은 입장이 무료였다. 어른 입장료 각자 900엔, 총 1800엔이라는 거금을 지불했는데도 마음은 뿌듯했다. 한 푼의 입장료를 절약했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노무라 히토시의 129개에 이르는 작품은 기본적으로 '사진'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장소에서 해를 달리하며 연속적인 사진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한 작품으로 배열하고 있었다. 같은 장소지만 시간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보이고 긴 세월 속에서 그 장소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갔다. 나는 아마도 우리나라 서울에서 이 작품을 시도했다면 완전히 다른 장소를 찍은 듯한 사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은 사진 외에도 평면이나 입체로 설치된 작품, 동영상, 책, CD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세계 속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우주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지혜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사진 속의 시간은 지구의 중력, 우주, 운하 사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결국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추상적인 회화와는 달리 현실세계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공감이 진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어려운 작품의 의미보다는 그가 남긴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진의 사실성에 매혹되었다.

"아! 이 흑백사진 봐 봐. 우리 어릴 적 1970년대의 골목사진과 너무나 같지 않아. 우리나라는 이런 골목들이 다 사라져 가는데…. 일본은 옛 거리들이 많이 남아있네. 일본 사람들은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열중하지만 자신들의 전통도 많이 남겨두는 것 같아."

아내, 딸과 같이 작품을 감상하다보니 신기한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가족과 함께 미술관을 함께 관람하면서 나는 한 작품을 보는 여러 각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노무라 히토시의 사진작품을 보면서 가슴 깊이 메시지를 공감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가족과 공감대를 느끼면서 작품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아쉽게도 이 명작들을 사진기에 담을 수는 없었다. 전시실마다 너무나 많은 안내원들이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눈을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전시실에서 나오는데 신영이에게 문자 전화메시지가 왔다. 어디에서 뭐 하고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신영이도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정말 예쁜 미술관에 와 있어. 너무 예뻐! 내가 사진 찍어가서 꼭 보여줄게."

거대한 질량감이 주변을 압도한다.
▲ 미술관의 원뿔형 기둥. 거대한 질량감이 주변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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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관의 충격적 영상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졌다. 나와 나의 가족은 기획전시실을 나오면서 2개의 거대한 팽이 모양의 기둥과 맞닥뜨렸다.

"야, 이건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인데! 정말 미래의 건축물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야!"

2개의 이 원뿔형 기둥은 넓게 개방된 공간 안에서 웅장함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통창 앞에서부터 2층과 3층 전체를 연결해주는 이 원기둥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미술관의 3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이 원기둥의 질량감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원기둥은 전체가 유리로 이루어진 유리벽으로부터 자연채광을 통해 강렬한 햇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사진촬영을 위해 준비된 명품 같은 장소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잘린 원뿔 모양을 뒤집어 놓은 이 명품을 만난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미술관의 1층 카페. 많은 시민들이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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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원뿔 모양 기둥 위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얹혀 있었다. 앞쪽의 원뿔 기둥은 3층과 연결되고 뒤쪽의 작은 원뿔 기둥은 2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2층 전시장 맞은편에는 '살롱 드 더 롱(Salon de The Rond)'이 잡지사 보그(VOGUE)와 손을 잡고 운영하는 카페인 '보그 카페(VOGUE Cafe)'가 있다. 샌드위치, 카푸치노를 파는 이  카페는 자리 잡은 위치가 워낙 아름다운 곳이라서 일본의 상징적인 카페로 유명한 곳이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미술관 건물을 감상할 수 있다.
▲ 미술관의 카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미술관 건물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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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결무늬 유리벽을 통해 들어오는 맑은 햇살을 맞으며 카푸치노를 마셨다. 나는 미술관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카페 안에 앉아있는 듯 했다. 이곳에 앉아 가슴 깊이 햇빛을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 국립신미술관은 건축물 외관만 놓고 봐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세계의 미술관 건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결국 이 도쿄 국립신미술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미술관에서 다시 내려오는 길이 내내 아쉬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도쿄, #국립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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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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