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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서해로 해맞이와 달맞이를 간다면, 남해로는? 단연 봄맞이가 제격일 거다. 제주도와 같은 섬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봄이 찾아드는 곳은 바로 땅끝 해남이다. 엊그제 강원도에서는 폭설이 내렸고 이번주 초에는 꽃샘추위가 찾아들 거라지만, 해남에는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3월의 첫 번째 주말에 올 듯 오지 않는 봄을 찾아 해남 달마산을 찾았다. 혹자는 빼어난 경관에 남도의 작은 금강산이라 손꼽기도 하고, 백두대간의 마지막 봉우리라 하여 장엄함을 애써 자랑하기도 한다. 마치 곧추 선 돌기둥을 붙여놓은 수석 전시장 같은 산세는 병풍 같기도 하고, 중생대 공룡의 딱딱한 등껍질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고작 해발 489미터 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아무리 능숙한 등산객이라도 달마산 능선 종주는 꺼린다고 한다. 양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외줄타기 하듯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니 여간 힘든 구간이 아니다. 특히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에게는 힘든 정도가 아니라 능선 곳곳에 위험한 구간이 많다. 그들에게는 등산이 아니라 모험에 가깝다고나 할까.

 

능선 종주까지는 아니어도 달마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무척 많다. 사시사철 붐비지만, 특히 봄내음을 만끽하기 위한 요즘이 제격이다. 남녘의 바닷바람에 실려 온 따듯한 봄기운은 상큼하게 코 끝을 간질인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를 통해 여전한 겨울을, 눈이 시도록 새빨간 동백이 움트는 모습을 통해 봄을 함께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좋다. 매화를 불러내려는 듯 성급한 동백꽃은 벌써 붉은 꽃잎을 떨구고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리 높지 않은 까닭에 산 아래에서 능선까지 오르는 건 다소 가파르긴 해도 어렵지 않다. 어느 쪽에서 올라도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굳이 정상인 불선봉이 아니더라도 능선에 올라서면 사통팔달 탁 트인 시야에 발아래를 굽어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맑은 날에는 바다 건너 제주도의 한라산까지 또렷이 보인다고 하니, 채 500미터도 되지 않은 산이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동쪽으로는 알록달록 보자기 천같이 예쁘게 정리된 간척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남서쪽으로는 푸른 바다에 보석처럼 박힌 다도해의 절경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눈과 가슴을 막아선 곳 없이 트여있어 도무지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다 담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달마산 등산은 대개 미황사에서 시작된다. 달마산이 꽃잎이라면 미황사는 꽃술자리에 자리한다. 미황사가 없었다면 달마산을 찾는 이가 이토록 많지는 않았을 테지만, 마찬가지로 달마산의 화려한 바위 능선이 배경이 되지 않았다면 미황사 역시 볼품없는 밋밋한 절로 여겨졌을 법하다.

 

신비로운 창건 설화와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천 년 고찰이거니와, 산에 오르기 전 신발끈 조여 매며 몸풀기 삼아 산책하기 알맞은 절이다. 기실 미황사는 근래 들어 바쁜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템플 스테이'가 유행하면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절 중에 가장 각광받는 곳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과 응진당 등 법당 건물 몇 채만 남은 조촐한 절이었는데, 늘어나는 여행객을 맞이하기 위해서인지 곳곳에 건물이 들어섰다. 성채처럼 튼실한 석축 위에 건물이 꽉 들어차 있어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제법 큰 도량이 되었다.

 

여느 절 같으면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웠을 테지만, 여전히 안온하고 고즈넉해 등산객들의 발걸음조차 다소곳하다. 밀려드는 등산객과 절을 찾아온 관광객을 감안하면 절 입구에 상가나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설 법 하지만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도시락이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오지 않았다면, 이십 리쯤 떨어진 북평면 소재지에 나가야 식당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고즈넉한 미황사는 분명 새뜻해졌지만 묵직한 세월의 더께는 벗질 못했다. 이것이 미황사의 매력이기도 할 터이다. 신비로운 전설로 더욱 눈길을 끄는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법당으로, 단청이 아예 없는 바깥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안이 사뭇 대조적이어서 이채롭다. 진면목을 살짝 감추고 있는 겸손한 건물이라고나 할까.

 

인도에서 돌배를 타고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금강산에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절이 세워져 있어 인도로 되돌아가던 중 금강산을 빼닮은 달마산 중턱에 절을 짓고 봉안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은 현재 남아있는 대웅보전 주춧돌마다 새겨진 게와 거북 문양 등 유물과 만나면서 그럴듯한 역사로 회자되었고, 우리나라 불교가 바닷길을 통해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튼실하고 위풍당당한 대웅보전이 남성적이라면, 그 뒤로 살짝 숨어있는 응진당은 여성적인 분위기 물씬 풍긴다. 대웅보전과 함께 미황사에서 보물 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건물이지만, 새롭게 칠한 단청의 때깔 때문인지 엊그제 세운 것처럼 느껴진다.

 

응진당은 주위로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데, 담 안에 숨어 누가 찾아오나 빼꼼하게 쳐다보는 듯한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다. 더욱이 건물에 비해 지붕이 크고 날씬해 입구 돌계단에서 보면 가냘픈 학이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뒤편에 넓게 동백숲이 펼쳐져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절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부도암에 이른다. 수가 많거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가장 정감어린 부도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또한 그곳은 달마산 등반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 부도암이라는 암자가 생기기 전에는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는데, 미황사로부터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조금은 어수선해졌다. 위안을 삼자면 여전히 길 주변으로 숲이 울창해 걷는 이의 마음을 맑힌다는 것이다.

 

등산을 마치고 절 아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등산화 바닥의 흙을 털어내려니 붉은 동백꽃잎이 매달려 있었다. 숲이 더욱 울창해질 때 다시 오라는 듯 인연을 남겨준 것이다. 불과 1~200미터 차이인데도 위아래의 공기가 다른 것을 알겠다. 달마산 위는 완연한 봄인데, 되레 절 아래가 여전히 찬 기운 도는 겨울이었다.

덧붙이는 글 | 봄철 등산로 주변 자연보호 관계로 미황사에서 달마산 정상인 불선봉까지의 1.3km 등산로가 임시 폐쇄돼 있다. 불선봉에 이르자면 미황사 부도암에서 시작되는 대밭삼거리 코스로 우회해야 한다. 아울러, 해남읍에서 완도까지 4차선 도로확장(일부 구간 공사중)으로 인해 광주광역시에서 달마산 미황사까지 자동차로 2시간 반이면 넉넉할 만큼 가까워졌다.


태그:#달마산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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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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