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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저 갯고랑에 망둥어가 지천이었는데, 허술한 낚시질에도 얼마나 잘 걸려들던지, 소주병과 초고추장 옆에 놓고 앉아서 망둥어 낚아 올려 고추장 푹 찍어 소주 한잔 하던 맛이라니, 그거 참 죽여주는 맛이었는데"

 

갈대밭 갯벌 사이로 움푹 깊은 갯고랑을 바라보며 누군가 불쑥 던진 말이다. 친구들은 어느새 옛날 망둥어 낚시 하던 추억에 빠져 드나보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날 때면 소주 몇 병 사들고 이쪽으로 망둥어 낚시를 왔던 때가, 비틀비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달리던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편안함과 나태를 떨쳐버리는 진흙길을 찾아 나서다

 

날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달리려하지도 않는다.

걷기조차 싫어 타려고 한다.

(우리는 주로 버스나 전철에 실려 다니는데)

타면 모두들 앉으려 한다.

앉아서 졸며 기대려 한다.

피곤해서가 아니다

 

돈벌이가 끝날 때마다

머리는 퇴화하고

온몸엔 비늘이 돋고

피는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간다.

우리는 매일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파충류처럼 늪으로 돌아간다.

 

-김광규의 시 '저녁 길' 모두

 

김광규의 시는 언제 읽어도 참 편안하다. 어쩌면 읽기가 쉽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많이 읽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용을 들여다보고 음미해보면 쉽다거나 편안하기만 한 시들이 결코 아니다. 그의 시 속에는 대부분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녁 길'도 간결한 시어 속에 자본주의 삶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공중을 날 생각은 고사하고 걷기조차 싫어하며 편안한 생활과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들을 비판한다. 아니 그런 삶에 빠져 있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돈벌이가 끝난 후에는 동물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인간상, 늙어가며 이성을 놓아버리고 무기력과 나태에 젖어 노년으로 가는 우리 세대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편안함에 젖고 나태하여 파충류처럼 아예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싫증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문명이 주는 평안에서 탈출이라도 하고 싶어서였을까? 이심전심으로 설연휴가 끝난 지난 16일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늠내갯골길'을 찾아 나섰다.

 

제주도 올레길이 생긴 이후 지방 이곳저곳에서 경쟁적으로 만들어 내놓은 이른바 '명품길'들 중의 하나다. 길은 시흥시청 정문 앞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역시 왼쪽 논두렁길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시작 되었다.

 

그런데 길 이름이 늠내 갯골길이다. 갯골길은 이해가 되는데 '늠내'라는 말은 도무지 낯설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늠내'는 고구려 시절 시흥의 지명으로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뜻인데 한자로는 잉벌노(仍伐奴)로 표기한단다. 늠름한 기상과 함께 은근하게 뿜어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향내가 묻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집을 나서면 모두 길인데 서울에서 멀리 시흥까지 길을 찾아 나선 것도 어쩌면 이런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길은 처음엔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도시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논두렁길이었으니까. 트랙터나 경운기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가끔씩 길을 따라 나란히 나있는 흐르지 않는 농수로에 갈대밭이 쓸쓸한 그런 풍경 말이다.

 

염전 갯벌가운데로 나서다

 

그런 길을 걸어 시흥 쌀연구소를 지나고 냇가에 서있는 작은 정자도 지나쳤다. 길에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등산배낭을 짊어지고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 세 명에게 물으니 우리가 가는 길이 갯골길이 맞다 한다. 사실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갈림길마다 두 개씩 서있는 솟대나무가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50여 분 쯤 걸었을까. 길은 처음 잠깐 동안 콘크리트 포장길이었지만 다음부터는 계속 진흙길이어서 신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논둑길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갯골이 나타났다. 갈대 갯벌에 깊숙이 파인 갯고랑, 썰물이어서인지 바닥에 졸졸 아주 조금씩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나 돌멩이는 고사하고 작은 자갈이나 모래톱 하나 없이 물기가 자르르 흐르는 진흙갯고랑.

 

그리고 갯고랑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갈대밭 갯벌,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그 갯고랑 둑길을 따라 왼편으로 걸었다. 그러자 갯고랑이 갈라지는 지점에 2층 정자하나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 올라보니 저 멀리 월곶과 소래지역 고층아파트들이 난데없이 초원 위에 불쑥 솟아오른 괴물처럼 멋대가리 없는 모습이다.

 

갯고랑 건너엔 조성공사를 하다가 겨울철이어서 중단된 생태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왼편 길을 돌아들어 멀리에선 마치 소금창고처럼 보였던 정문을 지나 생태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생태공원은 아직 특별히 볼 것이 없었다.

 

 

옛날 이곳 염전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모습과 갯벌과 갯고랑에 흔하디흔했던 농게모형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안으로 더 들어가자 옛날에 사용했던 소금창고 두 채가 보존되어 있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창고 안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창고로 가는 길가에는 생태학습장도 보인다. 학습장엔 옛날의 염전이 재현되어 있었다. 1955년 이전까지 갯벌바닥을 고르고 다져 염전을 했던 가장 오래된 형태인 토판염전, 그리고 1980년대 초까지의 형태인 옹기나 항아리 조각을 바닥에 깔아 소금밭을 했던 옹패판, 그리고 1980년대부터 바닥에 타일을 깔아 소금을 생산했던 타일판이 그것들이었다.

 

생태학습장을 지나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서자 갯벌 갈대숲 안으로 이어진 나무판자길 끝에 역시 나무판으로 세워진 작은 건조물이 보인다.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조류전망대다. 전망대 판자벽엔 이곳 갯벌을 찾는 수많은 종류의 새들과 서식하는 농게와 망둥어 등 갯벌생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창문처럼 뚫린 바로 바깥쪽은 갯고랑이다. 그러나 갯고랑에선 오리 몇 마리가 진흙을 헤집으며 꽥꽥거릴 뿐 농게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망둥어도 농게도 보이지 않는 폐염전 갯벌에서 옛날 추억만 새록새록

 

햇볕이 따사로운 전망대에서 잠깐 쉬며 간식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갯벌 가운데로 뚫린 길은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다행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걷는 느낌도 좋다. 길 오른편으로 펼쳐진 갯벌에는 차가운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밭과 함께 하얗게 마른 갯벌에 크지 않은 함초들이 역시 메마른 모습으로 서있다. 길 왼편으로 펼쳐진 갯벌은 옛날엔 염전들이 있던 자리였다.

 

폐염전에 다가가 살펴보니 대부분 바닥에 타일을 깐 타일판 염전들이다. 타일판 염전은 천일염 생산시설 중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것으로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염전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적어도 1980년대까지 소금을 생산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간간이 염전 사이 수로에 바닷물을 모아두는 해주 지붕이 폭삭 가라앉아 있는 모습도 보이지만 아직 멀쩡한 지붕들도 보인다. 문득 갈대밭 휘날리는 염전 어디쯤에서 누군가 수차를 밟으며 바닷물을 퍼 올리는 모습이며, 소금을 그러모으느라 고무래질하는 인부들의 모습도 떠오를 것 같아 주변을 휘둘러본다.

 

"이 부근 갯고랑 어디쯤에선가 망둥어 낚시를 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장소는 짐작도 할 수 없구먼"

 

일행들이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어림을 해보며 고개만 살랑살랑 흔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드넓은 갯벌엔 메마른 갈대들만 떨고 있을 뿐, 그 시절 왁자지껄 떠들며 일하던 인부들의 모습도 갯고랑 가에 소주병 차고 앉아 망둥어 낚시하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썰렁한 갯바람에 길만 휑하다.

 

이렇게 황량한 길을 왜 이곳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나 길이 어디 땅 위에 있는 길만 길이겠는가. 삶의 길 인생길도 길은 길이다. 갯고랑을 기어 다니던 농게와 망둥어들이 만들어 놓았던 길도 그들의 길이다. 그러나 그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 것처럼 길도 사라져버렸다. 어디 농게와 망둥어 뿐일까. 갯고랑 염전길을 오가며 소금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서해연안 바닷물 오염이 심해지면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던 천일염들도 판로가 막히고 말았다. 흙을 다져 만든 토판에서 옹기와 항아리조각을 바닥에 깔아 생산하던 옹패판, 그리고 타일을 깔아 겉으로 깨끗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지만 이 지역의 천일염은 결국 설자리를 잃고 만 것이다. 개발에 따른 갯벌과 바닷물의 오염 때문이었다.

 

수도권 개발에 따라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길도 많이 만들어졌다. 길이 열리는 곳엔 항상 개발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친다. 그러나 개발의 편리함 뒤에는 항상 검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오염과 환경파괴다. 길이 만들어내는 순기능이자 역기능이다.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시대와 시대,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갯골길은 옛 추억만 연결해주고 있을 뿐 시대와 세대의 연결은 하지 못한 채 단절되고 있었던 셈이다. 아련한 추억만으로 단절된 길을 연결할 수는 없었다.

 

추억 어린 갯고랑과 소금밭이 있던 드넓은 갯벌, 언제까지 보존될 수 있을까?

 

산길도 아닌 평탄한 길인데 다리가 아프다. 갯고랑이 나있는 길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저 앞으로 길이 쭉 열려 있다. 왼쪽 길은 아카시아길 섬산 길, 더 나아가 오른편으로 돌면 소래포구로 나서는 길, 갈 길은 많다. 어디든, 세상과 통하는 길,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 아니 갯벌과 갯벌 사이 나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가.

 

아카시아 길을 지나 더 나아가자 길이 좌우로 갈린다. 앞쪽에도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그 드넓은 갯벌 앞에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 땅은 내 땅(사유지)이니 넘보거나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히야! 이 넓은 갯벌이 사유지라니, 대단하군, 대단해, 이 넓은 땅이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늠내 갯골길은 오른편 길로 이어져 있었다. 갯골길을 걸으며 일행들이 좌우 갯벌들을 휘둘러본다. 겨울철이라 황량해 보이지만 참으로 정취가 넘쳐나는 풍경이다.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갯벌에 갈대꽃이 흐드러진 가을철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일까?

 

"이 갯벌들이 그냥 이대로 보존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저 괴물처럼 솟아 오른 소래와 월곶의 빌딩들이 너무 위협적이란 말이야."

 

우리들은 어느새 월곶이 가까운 지점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건너편으로 건너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른편으로 돌아 방산대교를 지나 포동펌프장, 부흥갑문, 군자갑문, 고속도로 다리 밑을 통과하여 처음 늠내 갯골길 걷기를 시작했던 원점인 시흥시청까지는 16.9km 시간은 쉬엄쉬엄 5시간이 지나 있었다.


태그:#늠내 갯골길, #갯고랑, #폐염전, #이승철, #망둥어낚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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