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란의 여학생들(쉬라즈)
▲ 오래된 문명의 깊이 ... 이란의 여학생들(쉬라즈)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여행을 하다보면, 낯선 도시에 도착한 첫날 분명 처음임에도 언젠가 와본 것 같고 자신과의 어떤 인연이 존재하는 것 같은 두렵고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순간 여행자의 시간은 한없이 소중하고도 비현실적인 것이 되곤 하는데, 이란의 오래된 도시 '야즈드'가 내게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길부터가 그랬다. 평생 달려도 풀 한 포기 볼 수 없을 것 같던 사막 위에는 오로지 한 줄기 도로만이 외로이 그어져 있었고, 그 끝에 야즈드가 서 있어 마치 오래토록 모래 속에서 잠자던 도시가 나그네를 맞이하기 위해 막 지상 위로 솟아오른 것만 같았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내가 안다고 하기보다는 이 도시가 나를 아는 것 같은 참 이상한 느낌.

아침부터 우린 그 이상한 도시 속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어딜 가나 모래 먼지로 풀썩였고 멀리 솟은 설산의 흰 머리를 빼자면 도시 전체가 누런 색감에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골목골목 미로가 이어지고 다닥다닥 붙은 흙집들은 간혹 단면을 드러내며 오랜 세월 덧붙이고 덧붙여 켜켜이 쌓여진 시간의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2,500년 전에 세워진 도시
▲ 모래도시 야즈드 2,500년 전에 세워진 도시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 돔 지붕과 바람 탑(야즈드)
▲ 오래된 도시, 야즈드 ... 돔 지붕과 바람 탑(야즈드)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무려 2500년 전, 다리우스 왕 시대에 세워졌다는 고도(古都) 야즈드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것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곳엔 여전히 사람이 산다는 것. 발굴해서 모아놓은 박물관이나 유적지와 달리 수 천년 동안 한 시대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일하고 노래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집과 길과 광장이 있었다.

문득 여행자는 궁금해졌다.

'이처럼 오랜 문명의 시공간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때였다. 배가 불뚝한데도 인상이 날카로운 한 남자가 다가와서는 자기 동네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흙집 실내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간절히 바라던 바였으므로 당연히 그를 따라나섰다.

그는 정말 이곳 출신은 아닌 듯 어느 집 대문을 두드리곤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들여다본 흙집은 TV나 냉장고 등 전자부품이 꽉 들어차 있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현대식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25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난 주인 여자에게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나올 때까지도 그 남자가 틀림없이 무언가를 요구할 거라고 여겼다. 그건 내 오만이었다. 그는 우리의 고맙다는 인사에도 별거 아니라는 손짓만 남기고는 총총 사라져갔다.

그때 좀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뭐라고 할까. 뭔가 다르다는 느낌. 하지만 여행자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일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 

... 조장(鳥葬)을 행하던 곳.
▲ 침묵의 탑 ... 조장(鳥葬)을 행하던 곳.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그 다음날, 일명 '침묵의 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야즈드는 최초의 일신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의 본산인데, 그들의 장례방식은 조장(鳥葬)이라고 시신을 높은 언덕 위에 놓아두고 새들이 쪼아 먹게 하는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침묵의 탑인 셈이다.

우린 지나가는 모녀에게 '버스'와 '침묵의 탑' 두 단어만을 반복하며 길을 물었다. 두 여인은 아내의 손을 붙잡고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도 그들 모녀는 가던 길을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 옆자리에 앉아 함께 기다리더니 버스가 오자 승차권을 덥석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 갑작스러워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버스에 오르니 이제 버스 안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이란 사람들을 사납다고 했나? 또 이슬람 여성들이 수동적이라고 했던가? 얼굴만 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차도르를 둘러쓴 여성들은 그들이 아는 서투른 영어를 총동원해서 앞다투어 이방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쉬라즈)
▲ 오래된 문영의 나라, 이란 ...(쉬라즈)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웨라유프럼?"
"유 네임?"
"하우 올드?"

그이들은 아는 영단어들이 다 떨어지자 이제 몸짓으로 말을 한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는 뜻이다.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방식은 이랬다. 시내버스 안에서, 그녀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또 우린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들 인연을 맺는다. 

그날 침묵의 탑에서 걸어 내려오던 길. 이번에는 반대편 차선을 달리던 차가 휙 돌더니 우리 앞에 선다. 무슨 일일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손짓한다. 머무는 숙소까지 태워주고 싶단다. 물론, 그 역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시장에서 세숫대야만큼 넓적한 이란 빵 '난'을 굽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자 하니 주인장이 느닷없이 금방 구워낸 '난'을 두 장 건네준다. 또 광장에서 만난 미술대에 다닌다는 여학생들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에게 머리에 두르는 예쁜 히잡을 선물한다.

.. 공원에서 차를 권하던 사람들.(야즈드)
▲ 엔시야의 가족들 .. 공원에서 차를 권하던 사람들.(야즈드)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이쯤 되니 여행자는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뭘까. 문명의 깊이일까. 단조로운 색감이 주는 감성일까. 아님, 나의 그 어떤 생애에 깊고 소중한 인연이 이곳 어디에 남겨져 있어 이처럼 환대를 받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만약 외로움에 지쳐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가 있다면 훌쩍 그곳으로 떠나보라는 것, 그리하여 그곳 어느 거리나 광장을 서성대라는 것, 그러면 틀림없이 누군가 당신을 부르고, 차를 권하고, 집으로 초대하여, 결국에는 당신 심장 깊은 곳에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지금 연재 중인 기사는 2003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아내와 함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때 만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로 출간했지만,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그동안 월간 <행복한 동행>에 연재해 왔는데, 이를 다소 수정하고 덧붙여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이란, #길은사람사이로흐른다, #야즈드, #조로아스터교, #조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