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삼성의 지휘통제소(control tower)로 불리던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의 공식문서에는 '이건희'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대문자 'A'가 쓰였다. 이건희 전 회장 부인인 홍라희씨는 'A''로 표현된다. 이 전 회장의 자녀들도 'JY'(이재용), 'BJ'(이부진), 'BH'(이서현) 등으로 적었다. 이렇게 이름을 독특하게 적은 이유는 삼성 안에서는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적 기업 삼성의 실체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봉건제 시절, 중국에서는 공문서에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며 "그런데 이런 관행이 21세기 민주사회에서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삼성 사장단이 회의 시작 전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
ⓒ 사회평론

관련사진보기

특수부 검사로 지내다 97년 삼성 회장 비서실(구조본)에 입사해 재무팀과 법무팀 등을 거쳐 2004년 7월 퇴사한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펴냈다. 이 책에는 김 변호사가 삼성에 근무한 7년을 포함해 지난 13년간 직접 봤거나 부딪쳐 알게 된 삼성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통해 폭로했던 비자금 조성, 경영권 불법 세습, 정·관·법조·언론계 로비 등은 잠시 놓아두자. 그리고 '김 변호사가 생각하는 삼성'으로 눈을 돌려보자. 

잘 나가던 검사직을 내던지고 삼성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김 변호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삼성이 "낡은 관행을 벗어나지 못한 법조계와 달리, '글로벌 스탠더드'가 잘 적용되는 조직일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이었다.

삼성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기업이었다. 이 전 회장의 이익 앞에서는 삼성의 이익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성을 움직여온 비서실이나 구조본 등은 '참모집단'이 아니라 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삼성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사장들은 회의 시작 몇 시간 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는다. 소변이 마려울까봐서다. 이건희가 화장실에 가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도 화장실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 비리에 관한 검찰수사가 안건으로 올라오면 사장들이 일제히 충성맹세를 한다. 자신들이 회장을 대신해서 감옥에 가겠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이를 "범죄영화의 한 장면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꼬집었다. 또 이건희 전 회장의 어록은 삼성 안에서 '헌법'으로 간주된다. 김 변호사도 삼성에 입사해 3개월간의 입문교육을 받았을 당시 1주일 내내 이건희 전 회장의 육성어록을 청취했다.

"구조본 팀장회의에서 결정을 내릴 때 적용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이건희의 이익이 그것이다. 삼성의 이익과 이건희의 이익이 충돌할 때면, 늘 이건희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구조본 팀장들이 기업경영자가 아니라 이건희의 가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다."

이건희 전 회장의 사조직 핵심 멤버는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전략기획실 사장이다. 제일모직 경리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이건희 일가의 최측근 가신인 동시에, 삼성을 움직이는 최고 수뇌부"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회장님과 그룹을 보위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을 떠올리게 하는 언술이다.  

김 변호사는 "이학수와 김인주가 삼성의 실세인 이유는 그들이 이건희로 통하는 '언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이건희를 수시로 만나 삼성 안팎의 문제를 상의하는 사람은 이학수와 김인주 뿐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19년간 근무한 김병윤 두레스경영연구소 대표도 "실제 삼성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이학수 사단"이라며 ""이학수 사단에는 인사와 관리·재무를 맡고 있는 인맥들이 포진돼 있어서 누구도 꼼짝할 수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청와대 비서실이 삼성 비서실을 흉내내 만들어졌다?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김인주 전 사장은 "시시한 벼슬도 다 족보에 남기는데 '삼성 사장'이라는 벼슬을 왜 족보에 못 남기느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그들에겐 삼성 임원 자리가 정부에서 공익을 위해 일하는 '벼슬'로 비치는 모양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이 공무원 로비 전용으로 쓰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나와 골프를 쳤던 어느 검사는 나를 가리켜 '전관(轉官)했다'는 표현을 썼다. 법원에서 검찰, 혹은 검찰에서 법원으로 옮길 때 썼던 표현이 '전관'이다. 공직사회 안에서 소속만 바뀔 때 쓰는 표현이다.

(중략) 그런데 삼성 법무팀을 공직으로 여긴다면, 법원이나 검찰 혹은 다른 정부기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 삼성 등 재벌로 옮기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공무원이 삼성을 위해서 일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어차피 공직수행이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해 3월 삼성전자 법무팀 사장으로 영입된 경우다. 삼성의 임원과 정부의 고위관료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셈이다. 

실제 삼성은 자신들이 국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 변호사의 증언이다.

"그들은 삼성 회장 비서실이 대통령 비서실을 능가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청와대 비서실이 삼성 비서실을 흉내내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성 내부 문서양식은 정부의 보고문서와 거의 같았다. 내가 공무원을 하다가 삼성에 가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구조본 팀장회의에 '노무현 정부의 명칭'건이 올라왔고, 당시 회의에서 '참여정부'로 의견을 모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공식명칭이 됐다. 

김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정책 가운데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고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삼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도 김동춘 교수의 지적처럼 '미국형 기업사회' 즉 "대기업이 정치권, 언론, 정부, 학계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체 기술자 위에 있는 비자금 기술자"

김 변호사는 삼성의 또다른 실체를 "반도체 기술자 위에 있는 비자금 기술자"라는 비유로 꼬집었다. 삼성이 반도체와 휴대폰 등 제조업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는 이 전 회장의 사조직인 '구조본의 임원'이 차지한다는 것.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조다. 희생을 치르고 조직에 기여한 사람과 성과를 챙기는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에서 일해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안다. 삼성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사람은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서 회사의 위상을 높인 사람이 아니다. 이건희, 이재용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대개 회사가 저지른 비리의 공범들이다. 삼성에서는 비리 공범이 돼서 수뇌부와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돼야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반도체 기술자'보다 '비자금 기술자'가 위에 있는 구조인 셈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반도체 기술자' '휴대폰 기술자'보다 이건희 일가를 위해 비리를 저지른 '비자금 기술자', 공무원을 타락시키는 '로비 기술자'들이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삼성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성장에 큰 공을 세운 윤종용 전 부회장이나 반도체 신성장이론인 '황의 법칙'을 만들며 반도체 신화를 일구어낸 황창규 전 사장이 각각 상임고문과 상담역으로 물러난 것은 이러한 지적을 잘 뒷받침한다. 

특히 최근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이아무개 삼성전자 부사장도 반도체 메모리 분야 최고 엔지니어였다는 점은 삼성의 조직문화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가수 나훈아가 이건희 파티를 거부한 이유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흥미롭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화들이 숨어 있다.

먼저 현직 검사들이 상가에 가기 위해 타고 간 이건희 전 회장의 전용기다. 김 변호사가 후배 검사의 상가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이학수 전 부회장이 이 전 회장의 전용기를 빌려줬다. 이 전용기에는 현직 검사 몇 명이 김 변호사와 함께 탔다.

"백 수십명이 탈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를 16인승으로 개조한 까닭에 공간이 넉넉했다. 침실과 와인바까지 갖춰져 있었다. 전용기 안에서는 스튜디어스가 무릎을 꿇고 기어와서 시중을 들었다. 동행한 검사들은 전용기 안에서 신기하다는 듯 연신 두리번거렸다."

두 번째는 이 전 회장의 생일잔치와 파티다. 생일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에게는 고급 와인은 물론이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푸아그라(거위간) 요리, 일본의 최고급 등심, 트뤼프 버섯으로 만든 소스를 대접한다.  

재밌는 사실은 이 전 회장 가족의 테이블에는 '냉장 푸아그라'와 '1000만원짜리 페트뤼스 와인'이 제공된 반면, 다른 손님 테이블에는 '냉동 푸아그라'와 좀더 싼 와인이 나온다는 점이다. 또 이 전 회장의 회갑잔치 때 가족들이 준비한 선물은 그의 방을 정확하게 축소한 모형이었다.

"이건희 일가의 파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장면은 음식을 내오는 장면이다. 호텔신라에는 드림팀이라는 게 있다. 한 기수당 50명쯤 되는데, 특별한 서비스 교육을 받은 여직원들이다. 이들은 온통 금빛인 큰 뚜껑으로 덮인 음식을 내온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손님들 테이블 옆에 서 있다가 일제히 금빛 뚜껑을 열어주는 장면은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장관이다."

끝으로 가수 나훈아씨가 이 전 회장 일가의 파티 참석을 거부했다는 일화다. 파티에는 보통 가수들이 오는데 2-3곡 부르고 3000만원 정도를 받아간다. 하지만 나훈아씨는 이런 파티에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성측에서 거액을 준다고 유혹했지만 참석을 거부했다는데 그 거부 이유가 걸작이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이런 일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 변호사는 이후 나훈아씨의 '영영'과 '사랑'을 자신의 애창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태그:#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이건희 , #이학수, #나훈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