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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저하고 있다. 우연히 찾아온 초청이민 기회를 덥석 잡고서는 고단했던 날들을 내치고 훌쩍 뉴질랜드로 먼저 떠난 남편과 딸아이를 따라 떠나기를. 그런 '나'는 한 남편의 아내요 예쁜 딸아이의 엄마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입된 현실과 거부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 사이에서 짧은 며칠 새 '나'는 심하게 요동친다.

 

"모든 사람들, 서른일곱이 되기까지 알고 지낸 그 모든 사람들은 내가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나라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말하자니 갑갑하고 침묵하자니 더 답답하기만 한 '나'는 초청장의 유효기한인 마지막 며칠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 결국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저만치 밀쳐놓고서.

 

<요트>(문학동네 펴냄, 2006)는 남편과 아내, 아이로 이루어진 그 흔한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이 요동치는 떨리는 갈등들을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의 이름이기도 한 첫 이야기의 제목 역시 '요트'이다. 새집을 얻게 된 아내의 꿈과 요트를 사고픈 남편의 희망과 아직은 어느 것도 자리 잡히지 않은 아이의 미래가 뒤섞인 '요트'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가지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 <요트>. 책 속 여기 저기서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꿈과 현실은 끈끈해야 할 가족애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와서는 정작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제각기 헤맨다.

 

첫 이야기 '요트'에는, 오랜 아파트의 재건축 과정에서 얻게 될 몇 십 억의 돈으로 요트를 사고야말겠다는 남편의 꿈을 어찌 달래야할지 고민하는 아내가 등장한다. 아들아이는 모난 구석 없이 착하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가족 모두와 자신의 꿈을 함께 실현시켜줄 계획에 몰두하고 있는 아내를 흔들어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들 때문에 아내는 철없는 투정만 하는 '아들(남편)'과 더불어 고3 아들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어렵사리 아들을 찾게 되었을 때 아내는 아이를 다독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요트 이야기를 꺼낸다. 요트 타고 싶지 않으냐면서.

 

가족과 남편, 가족과 아내, 가족과 아들, 가족과 딸, 여하튼 가족. 서하진 소설집 <요트>는 망망대해 푸른 하늘과 드넓은 바다를 마음껏 품에 안고픈 가족 각자의 꿈들이 서로 부딪치며 선뜻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중에서 제일 흔들리며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는 여자 혹은 아내 아니면 엄마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비망록(備忘錄), 비망록(悲忘錄)'.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멀쩡하게 잘만 살던 한 남자가 우연히 눈에 밟힌 한 여자를 따라, 평생 함께 한 아내와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들을 두고 훌쩍 떠난다.

 

우수에 찬 눈을 가진,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 남은 한 여인이 남자가 아내를 떠난 유일한 이유였다.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엔 아이도 생겼다. 아내는 되돌릴 수 없는 병을 안고 아들을 남긴 채 '홀로' 죽는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해 주는 단서가 되는 아버지가 남긴 비망록을 아들이 읽어가는 틈 사이로 슬프고도 당황스런 비밀들이 현실과 뒤섞여 다닌다.

 

'농담'에서는 이름이 있어도 이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 꿈을 오래도록 접고 살아온 한 아내가 남편과 실랑이를 벌인다. "희정씨, 민정씨, 아니 희연씨" 등으로 아무렇게나 불리는 늘 똑같은 일들을 벗어나 다시 공부도 하고 새 삶을 살고픈 아내의 꿈은 남편의 뚱한 반응 속에서 갈 길을 잃는다. 그리고 '꿈'은 아들을 영원히 떠나보내고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살아가는 엄마와 자기 등록금을 내주고 자원입대했던 오빠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채 '아들 잃은'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껴안고 사는 딸이 등장하여 남자의 부재와 여자의 상실에 대해 말한다.

 

'퍼즐'에선 웬만큼 사는 집안의 아들이며 별 일 없이 직장 잘 다니던 남편이 꿈을 실현하겠노라고 갑자기 사표를 던지면서 갑작스레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아내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옛 남자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여 큰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은 채 부부의 바뀐 일상을 펼쳐간다. 이루고픈 꿈과 살아야 할 현실이 부딪치는 상황 속에서 아내의 속앓이는 남편을 '부재중'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퍼즐맞추기가 되버린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너를 가두고 있어. 가벼운 이야기들이었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늘 그런 느낌이 들었어. 너를 가두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나도 알지 못하지. 그렇지만 느껴져. 너는, 그걸 인정해야 해. 언제나 생각을 한다고? 그게 어쩌면 네 문제일지도 몰라."(252쪽)

 

"이제 하루가 지나고 내게는 다시 이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이 다하고 나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될 것인지. 이 땅을 영영 떠난다면, 바다와 하늘과 가없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서 허위허위 살아온 내 서른일곱 해를 잊을 수 있을까. 내 남루한 날들을 나는 정말 버릴 수 있을까. 나를 가두는 것,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255쪽)

 

'시간이 흘러도'는 아내의 고민이며 엄마의 고민이기도 한 어려운 결정을 놓고 갈등하는 또 한 여자의 애타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기 꿈, 생각, 의지 모든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가둬두는 건 정말 자신일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헤매고만 있다. 돈이 되기는커녕 힘만 들었어도 잘 견뎌낸 공부방 운영도 이제는 안녕이라는 듯 모든 걸 다 놓고 "나는 이제 지쳤어"라고 남편이 말했을 때도 아내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야 아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남편이 정말 모든 걸 다 놓고 초청이민 기회를 기회로 여기며 훌쩍 먼저 떠나버렸을 때 아내는 그제서야 자기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내도 엄마도 아닌 한 여자의 위치에서 시인이기도 한 '나'는 비로소 '나'를 바라본다.

 

<요트>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꿈과 현실들이 어긋나는 다양한 상황들을 담고 있다. 크게 보면 남자의 꿈과 아내의 현실이 서로 어긋나고 또 부딪치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요트>를 채우고 있다. 갈등이 생기기 전에는 선뜻 알아채기 어려웠던, '여자'를 감싼 고리를 풀어내려는 '나'의 요동치는 움직임들이 <요트>에선 여러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요트 구입에 몰두하는 '남자' 옆에선 '여자'의 현실이 쉬어야 할 '요트'가 숨어 있다. 여자의 '요트'는 선뜻 나타나지도 않고 나타난다 한들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요트>는 남자의 이름이 꿈을 찾아 헤매고 여자의 현실이 가족을 어렵사리 감싸 안고 있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정작 요트가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것 같다. 가족 모두를 태울 요트는 지금 <요트> 어딘가에서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요트> 서하진 지음. 문학동네, 2006.
* 이 서평은 제 블로그(blog.paran.com/mindlemin)에도 싣습니다.


요트

서하진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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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요트, #서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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