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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참 자연스럽게 또 다른 벗으로 죽음을 맞아들인다. 맞아들이는 때가 곧 사라지는 때라는 게 여간해선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인 걸 어찌 하랴. 제 몸뚱어리조차 하늘로 날려버릴 만큼 거침없이 울어대던 철모르는 시절을 이제 막 잊어버릴 만할 때에 사람들은 그냥, 훌쩍 떠나버리곤 한다.

 

<나도 이별이 서툴다>(폴린 첸 지음/공존 펴냄)는 어느 외과 의사의 진솔한 경험담과 그것에 잇닿은 생각들을 담은 책이다. 생명의 꿈틀거림을 온몸으로 아는 엄마로서, 생명을 되찾아주는 일보다는 얼떨결에 맞이하는 죽음들을 바라보던 일들을 더 많이 마음에 담곤 했던 의사로서, 폴린 첸은 죽음과 임종에 대한 솔직한 의견들을 책에 담았다.

 

"죽음 대비는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머리말, 12)

 

어떤 면에서는 죽음을 향해 무작정 직진 주행을 하는 게 바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썩 환영받지 못할 표현이긴 하지만, 죽음을 향한 모든 생명의 발걸음은 부인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는 만인의 공통분모이다. 정작 살펴야 할 문제는, 그런 엄연한 사실을 많은 이들이 갑작스레 맞이하거나 허무하게 스쳐가곤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제 죽음을 서둘러 갑자기 떠안기도 하고 바로 옆에서 늘 호흡하던 이의 생명이 떠나버린 흔적을 뒤늦게야 알아채고 멍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장 낯익은 풍경일지 모를 생의 마지막 때에 의외로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인곤 한다. 폴린 첸도 그랬다.

 

"그날 이른 오후에 나는 에리카로부터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 실링저씨가 방금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간단한 메일로 받았다. (…) 한 달 뒤 에리카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의 힘든 기억으로 울먹였다. "지난 몇 달 동안 담당 의사가 '죽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 것 같니?" 그녀가 물었다.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쉽게 알아챘을 것이기에 나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딱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 "의사는 딱 한 번 죽음에 대해 우리와 의논했어. 그 다음에는 아빠에게 어떤 처치를 할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어." 에리카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내게 다시 물었다. "우리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데 왜 이렇게 서툴까?"(7-9)

 

폴린 첸은 의사 지망생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흔히 생각하는 의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아주 보람찬 일을 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의대생이 되어 의사의 길에 막상 들어선 이후 알게 된 사실은 되레 그 반대였다. 수없이 많은 생명과 죽음의 교차점에 서서 점점 더 무표정한 얼굴과 무감각한 태도로 죽음을 바라보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의사로서 본분을 다 하면 할수록 그래서 '의사답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죽음 앞에 선 한 생명의 숨죽이는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곤 했다. 첸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지만 사람을 아는 사람을 되찾고픈 맘이 강해졌다.

 

조금씩이라도 나날이 발전하는 의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는 게 보람찰 만도 한데 폴린 첸은 그보다는 더 이상은 만날 수 없는 '지나쳐버린' 생명들에 대한 생각들에 더 많이 빠져들었다. 더 이상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이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되돌아보고 '준비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의사로서 해야 할 의료 행위에만 몰두하는 것에 대해 점점 이상한 회의가 들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실수'(!)들을 겪으며 더 나은 경험과 실력을 갖춘 의사가 되어갈수록 의사이기 전에 환자와 똑같은 한 사람인 폴린 첸 그 자신을 놓치는 것만 같았다. 의사와 환자라는 만남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더 절실해져만 갔다.

 

<나도 이별이 서툴다>는 죽음이라는 엄청난 충격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온 한 의사의 솔직한 고백을 담았다.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의사로서는 점점 더 서툴지 않게 됐지만 환자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으로서는 죽음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헤매곤 했기 때문이다. 책은 그런 고민의 흔적인 셈이다.

 

"오늘 수업 중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게 있다면 이것 한 가지입니다."

그녀는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검은 눈동자에는 갑자기 눈물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은 좋은 의사가 될 겁니다. 단, 환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208)

 

폴린 첸은 '환자 면담'이라는 과목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하면서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드러냈다. 그건 사실 평생에 한번쯤은 반드시 죽음 앞에 서는 '환자'가 될 수많은 이들을 진정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첸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바라는 솔직하고도 꼭 필요한 평범한 아름다움 말이다.

 

<나도 이별이 서툴다>는 생명의 탄생 만큼이나 '준비'가 절실하게 필요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의사이면서 동시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의 고백이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도 이별이 서툴다-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 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공존, 2008.
Final Exam: A Surgeon's Reflections on Mortality by Pauline W. Chen(2007)


나도 이별이 서툴다 - 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

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공존(2008)


태그:#나도 이별이 서툴다, #FINAL EXAM, #폴린 첸, #죽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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