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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동에서 서회선 일주도로(12번 국도)를 타고 열심히 제주의 서쪽을 향해 달렸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만큼 마음은 점점 더 급해진다. 오늘만큼은 저 태양이 제주의 바닷속으로 잠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으면 그리울 것도 없을 것이고, 간절함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결국, 이호동에서 이호해수욕장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바다 근처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제주도 서쪽은 내가 살던 동쪽과 멀어서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결국은 이호해수욕장 주차장에서 끝난 해안도로, 빨강 애마는 더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젠 돌아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떨어지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건물들 위였다. 카메라 배터리 충전기 문제로 탑동에만 가지 않았어도 충분히 보기 좋은 자리에서 일몰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쉽다. 배터리 충전기를 사려고 탑동으로 다시 유턴을 해야만 했던 하귀해안도로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해는 붉은빛으로 물들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무는 해가 그 어딘가에서는 떠오르는 해일 터이다.


아쉬운 대로 이호해수욕장의 바다를 배경으로 일몰 사진을 담았다. 2009년도는 사진으로 치면 거의 최악의 해였다. 작품이 될 만한 사진을 거의 담질 못했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사진만 담았다.


내가 원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이호해수욕장의 일몰도 좋았다. 황홀할 정도의 일몰은 아닌데도 제주의 바다가 만들어내는 일몰의 빛은 신비스러웠다. 바람은 잔잔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제주에만 오면 태풍에 바람에 비가 와서 정나미가 떨어지려 하더니만, 마음이 변했는지 바람도 잔잔하다. 육지에서 동장군의 기세에 잔뜩 움츠렸던 몸이 서서히 기지개를 편다.


 

그런데 새로 생긴 방파제에 등대가 서 있다. 언젠가 사진에서 본 적은 있지만, 그 등대가 여기 있는지는 몰랐다. 등대를 만든이는 제주의 말을 상징한다고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각진 구성 때문인지 보는 순간 '트로이의 목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주가 가진 곡선의 미와는 전혀 맞지 않는 콘크리트구조물이라고 생각을 했다. 참으로 생뚱맞은 두 마리의 트로이 목마, 핏기라고는 하나 없는 하얀 놈과 혈기왕성한 종마를 닮은 빨간 놈이 대가리에 불빛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트로이 목마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그리스(스파르타)에 갔다가 메넬라오스왕의 아내였던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로 돌아왔다. 헬레네는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다의 딸이며, 사람이 낳은 여인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신화에는 그것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아무튼 젊은 왕자를 선택했다. 이 일은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다.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전략에 따라 전쟁을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꾸미고 함선의 일부를 퇴각시켜 인접한 섬 뒤에 숨겨두고는 거대한 목마를 만들었다. 트로이 주민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트로이군은 축제를 벌이고 술에 취했고, 목마에 숨어 있는 용사들이 성안을 점령했고, 그리스의 대군이 성안으로 들어와 트로이를 몰락시켰다.


제주의 부드러운 곡선미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저런 식의 건축물(?)들이 제주를 하나 둘 잠식해가면 트로이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경고성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작가(?)의 고단수 전략일까?


 

백설의 한라산이 노을빛을 받아 약간 붉은빛이 돌기 시작한다. 저 붉은빛이 강렬해서 바다와 하늘과 한라산 모두를 물들이고, 거기에 구름도 몇 점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날을 만나는 것도, 그 순간 카메라로 담을 수 있는 것도 그냥 운으로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제주의 바람을 담았던 사진작가 김영갑. 그는 고인이 되었지만, 제주의 바람을 담은 그의 사진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가 담은 사진 중에서 작품이라고 내어놓은 한 장의 사진을 담으려고 수도 없는 답사와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며, 그 수고에 대한 아주 작은 응답을 제주의 바다, 하늘, 오름이 그에게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백설의 한라산, 그 위로 인공의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저 큰 새의 도움을 받아 1시간 만에 제주에 도착할 수 있었으면서도 바람의 섬 제주도가 조금은 더 태고적의 모습을 간직한 불편한 섬이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다.


이호해수욕장을 거닐다 보니 자연이 그린 그림이 물 빠진 모래사장에 남아있다. 자연이 그린 그림, 그 신비함이란!


(이어집니다)


태그:#제주도, #이호 해수욕장, #트로이 목마, #제주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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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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