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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는 앨범 주인은 큰 누님(78세)이다. 그런데 필자가 5년 넘게 다녔던 학교 앨범이어서 그런지 그 옛날 급우들과 뛰놀던 아련한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해서 어제 기사에서 소개하지 못한 이미지와 필자 경험담을 올릴까 한다.

교장 선생님 관사

김진용 교장 선생님, 앞으로 밀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쇠 유리창과 앞에 놓인 공전식 전화기가 이채롭다.
 김진용 교장 선생님, 앞으로 밀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쇠 유리창과 앞에 놓인 공전식 전화기가 이채롭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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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문은 중앙로, 후문은 '둔배미 고갯길'과 통했는데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지은 교장 관사가 있었다. 구 옥구군청 건물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관사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교장 선생님이 그만큼 위엄 있고 높아 보였다는 얘기다.

필자가 입학하던 1957년에는 권정식 교장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12월18일 부임해서 1960년 전주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당시 5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들은 학교 정문에서 구 군산기차역까지 도로변을 가득 메우고 눈물과 박수로 배웅했는데 펑펑 우는 여학생이 많았다. 필자도 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으니까.

어지러운 시절을 반영하는 운동회 사진

반세기 가까이 왜놈들에게 핍박을 당하던 우리는 1945년 8·15일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남과 북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사상대결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래서일까. 64년 전 앨범 운동회 사진에 담긴 '자유 조선아 속히 오라!'라는 글귀는 좌·우 대립의 혼란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당시 백성들의 절규로 들렸다.

가을운동회 한 장면. 워낙 오래되어 무슨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자유조선아 속히 오라”라는 글귀가 당시 백성들의 절규로 들렸다.
 가을운동회 한 장면. 워낙 오래되어 무슨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자유조선아 속히 오라”라는 글귀가 당시 백성들의 절규로 들렸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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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우리는 '인민군', '인공', '인공기'라는 단어를 쓰면서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등장하면서 살며시 사라졌고, 급기야는 무서운 낱말로 둔갑해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와 동요에 나오는 '어깨동무'와 '동무들아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의 '동무'가 이북에서 상용된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깨동무' 세대인 필자도 세뇌됐는지 '동무'소리가 두렵고 무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중앙초등학교의 뼈아픈 '발자취'

50년대 중반에 지은 신관 건물, 1층 맨 끝이 5학년 때 교실이어서 아련한 추억들을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
 50년대 중반에 지은 신관 건물, 1층 맨 끝이 5학년 때 교실이어서 아련한 추억들을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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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5월13일 '군산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한 '군산 중앙초등학교'는 일본인에 의해 설립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 자녀만 다녔던 교육기관으로 학교 발자취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중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연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 중 화재로 건물 전소./1921년 4월 수업연한 6년제 인가/ 1941년 4월1일 군산소화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휴교./ 1945년 9월24일 미군정 포고령에 의해 개교/ 1950년 7월13일 한국전쟁으로 휴교/ 1950년 7월19일 북한군 군산시당 사무소로 사용/ 1950년 10월1일 연합군(UN)과 국군이 주둔/ 1950년 10월10일 개교

설명에는 없지만,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7월13일 군산 시내 6개교 200명이 넘는 학도병들이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전선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을 넘어 군산에 입성한 북한군이 19일부터 사용했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가슴 아픈 우연으로 받아들여진다. 

금강을 넘어온 북한군이 중앙초등학교를 당 사무소로 사용했고, 신관 건물 전체가 제 2피난민 수용소가 되었으며, 1952년 6월에는 육군 제 1신병 보충연대가 학교 전체를 사용하는 등 중앙초등학교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52년 9월에는 전교생이 군산초등학교 후관과 강당에 수용되어 수업해야 했다. 그렇게 쫓겨 다니며 수업을 하던 학생들은 1956년 6월에야 복구공사가 완료되어 보금자리로 돌아와 수업을 받게 되는데, '발자취'보다는 '시련'으로 표기하는 게 합당할 것 같다.

군악대 트롬본에 반하기도

육군 보충연대는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에 나뉘어 주둔했다. 군인들이 이동할 때는 군악대가 앞에서 군가나 행진가를 연주했는데, 연주에 맞춰 걷는 군인도 군인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트롬본을 어깨에 걸치고 연주하는 군악대 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악기와 달리 트롬본은 묘했다. 어린 마음에 U자 모양의 긴 밸브를 피스톤처럼 넣었다 뺐다 하는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항상 연주를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들고 갈 때가 잦아서 연주를 보려고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따라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군악대 아저씨들 복장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트롬본이 가장 멋있게 보였던 것만은 분명한데, 당시 부대는 지금의 논산훈련소 전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얼마 후 군산에 주둔하던 부대가 모두 벌판이었던 논산으로 이동해갔으니까.

천막교실의 추억

일제강점기에 지은 서관(왼쪽) 건물과 강당(오른쪽). 미끄럼틀이 있던 자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운동장 한편을 밭으로 일구어놓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담을 넘으면 군산에서 길이 가장 넓고 번화했던 ‘중앙로’인데..
 일제강점기에 지은 서관(왼쪽) 건물과 강당(오른쪽). 미끄럼틀이 있던 자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운동장 한편을 밭으로 일구어놓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담을 넘으면 군산에서 길이 가장 넓고 번화했던 ‘중앙로’인데..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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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막사로 사용하던 천막은 필자가 다닐 때까지 남아서 학생들 교실로 사용했다.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 다니던 3학년 때 교실이기도 한데, 벽이 나무이고 바닥이 맨땅이어서 신발을 신고 공부했지만, 난로를 피워주지 않아 벌벌 떨어야 했다.

천막교실 주변에는 각종 채소가 심겨진 텃밭이 있었고, 5월이 되면 뒤편 언덕에는 아카시아가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 공터에는 퇴비로 사용할 풀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았는데, 다른 반 아이들과 '탑 쌓기' 겨루기를 하느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도 몰랐다.

천막교실 칠판 위에는 미소 짓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는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아침조회 때마다 사진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런데 70년대에 김일성을 비판하는 TV를 시청하다 "나도 북한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가 복교(1955년)될 때까지 군산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수업을 해서 '거지 떼'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축구시합 때 다른 학교 응원단이 "중앙 거지 떼"라고 놀리면 우는 여학생도 있었다. 천막교실은 결국 많은 학생과 학부모를 놀라게 하고 사라졌는데, 1963년 2월 폭설로 붕괴되었다.

작년 가을, 자료를 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초등학교 모교를 찾아가 신원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더니 1985년 이전 앨범과 기록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죄송하다는 직원을 탓할 수 없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나 허전하고 실망했는지 모른다.

큰 누님은 초등학교 앨범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한 것 같다. 중학교 진학을 못해 속상했던 일,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배우다 해방을 맞이했고, 미술을 잘해 선생님에게 귀여움을 받았다는 등 학교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와 시내 누구누구가 급우였다는 것까지 얘기해 주면서 정작 앨범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진학을 어머니에게 죽도록 졸라도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실망감에 앨범을 찢거나 버릴 수도 있겠지만, 보물처럼 간직해오다니, 큰 누님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투병 중인 누님의 건강을 빌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 조종안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중앙초등학교, #졸업앨범, #큰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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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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