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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단기(檀紀) 4280년(서기 1947년) 군산 중앙초등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이하 앨범) 표지와 아침조회 광경이다. 정부 수립 전이어서 교육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인데 앨범을 제작하다니 놀랍다.  

64년 전 중앙초등학교 앨범 표지. 중앙초등학교는 ‘공립(公立)’으로, 필요할 때만 표기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민학교 앞에 ‘공립’을 붙여서 불렀던 모양이다.
 64년 전 중앙초등학교 앨범 표지. 중앙초등학교는 ‘공립(公立)’으로, 필요할 때만 표기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민학교 앞에 ‘공립’을 붙여서 불렀던 모양이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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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조회 하는 모습. 필자가 다니던 50년대 풍경과 흡사하다.
 아침조회 하는 모습. 필자가 다니던 50년대 풍경과 흡사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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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1948년 이승만정부 수립,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교과서 및 공책에는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는 글귀가 담긴 '우리의 맹세'가 실렸다. 그런데 좌·우가 극과 극으로 대립하던 혼란기임에도 북한을 배격하는 글이나 구호가 없어 눈길을 끌었다.

큰 누님이 앨범 임자인데 당시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앨범'이란 단어가 생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단기 4280년' 뒤에 '七月'을 붙인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에는 2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었다고 하니까 1학기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제작된 게 아닌지 유추해본다.
 
앨범 앞표지에 책과 꽃다발이 그려져 있어 동화책을 떠올리게 하는데, 올해 일흔여덟 살 되는 큰 누님만큼이나 늙고 병들어 보인다. 표지 여기저기가 해지고 터지고 누렇게 변하는 등 세월의 나이가 켜켜이 쌓여 있기에 하는 얘기다.

큰 누님 반이었던 ‘六 의 五’ 단체사진. 누가 갈라놓기라도 한 것처럼 왼쪽은 일본식 세라복, 오른쪽 학생들은 한복 차림이다.
 큰 누님 반이었던 ‘六 의 五’ 단체사진. 누가 갈라놓기라도 한 것처럼 왼쪽은 일본식 세라복, 오른쪽 학생들은 한복 차림이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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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급 단체사진인데 머리는 하나같이 가위로 자른 단발머리요. 일본식 세일러복 차림과 검정 무명 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학생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단정한 양장 차림 학생도 띄는데, 시대를 앞서나가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  

사진에는 훗날 군산여상 배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결혼도 하기 전에 바람이 나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 부모 애간장을 태우는가 하면, 주조장(술도가)을 경영하는 부잣집 맏며느리로 들어가 젊은 시절을 떵떵거리며 지낸 여학생도 있다. 그들도 이제는 세상을 뜨거나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터인데, 세월이 도둑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졸업 횟수로 보이는 '第三十八回' 아래에 누군가가 '趙淑子'라고 적어놓아, 큰 누님 어렸을 때 이름이 '숙자'인 것을 알았고, 이름이 일본식이라고 해서 '정숙'으로 개명한 것도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 필체도 아닌 걸 보니, 담임선생님이 앨범을 나눠주려고 메모해놓은 것 같다.  

교장과 선생님들 단체사진

교장선생님 사진. 현관 사진과 학교 전경 사진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교장선생님 사진. 현관 사진과 학교 전경 사진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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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 사진이 흥미로웠다. 권위주의가 판치던 60년대를 전후해서 제작된 앨범 같았으면 교장이 집무실에서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한 사진 한 장만 들어갈 자리이다. 그런데 교장 인사말도 없고, 학교 전경과 현관 출입구 사진이 함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앨범은 표지까지 13쪽으로 제작되었는데, 물자가 부족했던 때이니까 아끼려고 함께 넣었다고 할지 모른다. 일면 타당성도 있으나 지금이라고 넉넉한 것은 아니다. 신문용지 재료도 수입해서 쓰고 있으니까. 아무튼, 당시만 해도 계급이나 권위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시절로 짐작된다.

선생님들 단체사진. 표정들이 대체로 자연스러워서 좋은데 사진 아래 ‘스승들의 모음’ 글귀가 앨범이 제작된 시기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단체사진. 표정들이 대체로 자연스러워서 좋은데 사진 아래 ‘스승들의 모음’ 글귀가 앨범이 제작된 시기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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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 단체사진인데 패션이 60년대 초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고,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자유분방하다. 학교 정원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복, 양장, 양복, 노동복 등 옷차림이 다양하고 포즈도 제각각이어서 하는 얘기다. 

선생님 중에는 80대 후반이나 90대 초반으로 지금까지 살아계시는 분도 여럿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데, 앞줄 몇 분은 무릎에 손을 얹고 카메라 렌즈를 주시하고 있어 옛날 시골집 가족사진 냄새를 풍긴다.

뒤에 서 있는 분들은 팔짱을 끼거나 시선도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곳을 바라보고 있어 미소를 짓게 한다. 가난에 쪼들리던 시절임에도 여선생님들 옷차림이 전통적이면서 자연스럽고 세련미가 넘쳐 마음의 부담을 덜어준다.  

'바똥 복스의 교감선생님과 안 선생님'... 정겨운 글귀들

앨범 사진을 설명하는 글귀 중에 '자랑거리 우리 모교', '스승들의 모습', '즐거운 원족', '골마루', '아담한 정원' 등은 무척 순수하고 살갑게 느껴진다. 운동회 사진에서 '오늘만은 교장선생님도 1학년보다 늣다', '바똥 복스의 교감선생님과 안 선생님' 등은 따뜻한 미소를 짓게 했다.

소풍 사진. 배경이 큰 수원지로 보였고, 소풍을 ‘원족’아라고 표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소풍 사진. 배경이 큰 수원지로 보였고, 소풍을 ‘원족’아라고 표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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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처마에 걸린 사이렌. 사진 설명 ‘다름질 시키든 싸이렝’이 정겹게 다가왔다.
 교사 처마에 걸린 사이렌. 사진 설명 ‘다름질 시키든 싸이렝’이 정겹게 다가왔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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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질 시키든 싸이렝'이라고 적힌 사진 설명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맞춤법이야 현직 대통령도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고, 시대에 따라 변하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해방 20년이 지나도록 일제잔재인 사이렌 소리로 수업시작과 끝을 알렸기 때문이다.

필자가 중앙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수업 시작과 끝을 사이렌 소리가 알렸다. 학교 근처에 사는 주민 중에는 부엌에서 설거지하다 이웃집에 화재가 난 줄 알고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었다는 분도 있었다.

5년 넘게 다니면서 사이렌 소리가 귀에 익었는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던 1961년 7월에 구암초등학교로 전학해서 말로만 듣던 종소리를 들으니까 느낌이 이상하고 산골학교에 온 것처럼 신기했다.

일제 강점기에 열린 가을운동회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 만든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에서 열린 운동회 모습이다. 여학생들이 공굴리기를 하고 있는데, 그 옛날 가난한 시절에도 운동회 날은 즐겁고, 삶은 밤에 붉은 감이 빠지지 않았으며, 이웃이 총동원하는 잔칫날이 되었을 것이다.

운동회 모습. 필자가 코흘리개 시절 가장 많이 놀았던 장소여서 친구들과 놀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운동회 모습. 필자가 코흘리개 시절 가장 많이 놀았던 장소여서 친구들과 놀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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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전에도 운동회 시작 전에 교장선생님의 지겨운 훈시와 행진, 100m 달리기, 이어달리기, 탑 쌓기, 공굴리기 등을 했는데, 운동장에서 뛰놀던 학생들이 지금은 여든을 넘겼거나 코앞에 둔 할머니가 되었을 거로 생각하니까 가슴 한구석으로 허전함이 밀려온다. 

지질이 형편없는 데다 세월이 지나서 그렇지, 사진을 언밸런스로 배치했으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센스를 보면 60년-70년대에 제작한 앨범과 다를 게 없었다. 70년대에 들어와 피사체를 비뚤어지게 잡아서 찍는 게 유행하기도 했으니까.  

멀리 보이는 건물과 굴뚝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가등정미소인데, 운동장은 필자가 뛰어놀던 놀이터였고, 정미소 창고 옆 골목에는 지금도 형님이 사는 고향집이 있어서 그런지 새롭게 다가온다. 정미소는 왜놈들이 호남의 쌀을 더 많이 수탈해가기 위해 1930년대 초에 지은 대형정미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운동장 자리는 주택단지가 되었고, 정미소 자리에는 임시 공설시장이 입주해 있어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뒤쪽에 있던 석산도 오랜 채석작업으로 평지가 되었는데, 그래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아담한(?) 정원

후관 앞에 있던 중앙초등학교 정원. 왜색 냄새가 지독한데, 그래도 동네 어른들은 잘 조성된 정원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후관 앞에 있던 중앙초등학교 정원. 왜색 냄새가 지독한데, 그래도 동네 어른들은 잘 조성된 정원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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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서는 '아담한 정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으스스한 정원으로 기억될 뿐이다. 오죽했으면 학생들 사이에 '해가 지고 비가 내리는 날은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까. 방과 후에는 셋이서도 가는 걸 꺼려할 정도로 음침했으니까.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정원에는 다람쥐와 칠면조 사육장이 있었고, 시멘트로 만든 돌다리, 석등, 인공 계곡도 있었는데 자연에서 느끼는 시원함이나 여유를 느끼기보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공으로 조성한 정원마저도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작년에 들렀다가 유치원이 들어서면서 칠면조 사육장과 정원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며 옛것을 너무 허술하게 생각하는 세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졸업앨범, #중앙초등학교, #큰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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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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