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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가 일곱 살이 된 지 꼭 사흘이 지났습니다. 오늘 수연이는 <호두까기인형> 그림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습니다. 사실 최근까지, 그러니까 여섯 살 막바지까지 수연이가 가장 아꼈던 책은 황순원의 <소나기>였습니다.

여섯 살 아이가 <소나기>의 감성을 이해할지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실 처음 수연이에게 <소나기>를 선물할 때 엄마인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의 꼰뚜라 풍얼이 시작되었습니다.

"쳇! 유아들한테 50쪽이 넘는 외국명작동화를 영어원서로 읽히는 이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46쪽짜리 우리 소설을 읽히는 게 뭐가 이상해!"

수연이는 일단 제목과 표지그림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혼자서 30분 정도 책을 뒤적거리더니 드디어 "엄마, 읽어주세요!"를 외쳤습니다. 처음 <소나기>를 읽었을 때 수연이가 가장 재미있어 한 부분은 소녀가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는 "엄마, 이 언니 정말 나쁘죠?" 하고 물었습니다. 여섯 살 수연이는 그 장면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정말 개구쟁이여서 그럴까?" 되묻고는 다른 말은 곁들이지 않았습니다.

수연이는 몇날며칠 그 장면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지는 소녀의 머리 위에는 작은 말풍선이 있었습니다.
거기엔 어김없이 "바보! 바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소녀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수연이가 <소나기>를 만난 지 보름쯤 지난 후,
수연이는 소녀가 소년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엄마, 이 언니야가 이 오빠야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죠?"
차츰 <소나기>의 감성에 다가서는 수연이를 보며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언니야처럼 끝물꽃을 꺾어보고 싶어요." 하는 수연이의 부탁에 우리 가족은 칡을 찾아 헤매기도 했습니다. 영종도의 어느 횟집 담벼락에서 칡덩굴을 찾은 우리가족은 수연이 덕에 그 집 단골이 되기도 했습니다. 철이 아니어서 끝물꽃은 보지 못했지만 내년 여름, 수연이의 키가 닿는 곳에 끝물꽃이 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수연이가 <소나기>를 읽은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수연이는 소녀와 소년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언니야가 안 죽었으면 나중에 이 오빠랑 결혼할 텐데..."
수연이는 그림 속 소녀의 하얀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습니다.

수연이는 자기가 느끼는 그대로 <소나기>를 무척 아꼈습니다.
어느 날, 잠들기 전에 제가 수연이에게 물었습니다.
"수연아, 언니야가 왜 꼭 그 분홍색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고 그랬을까?"
"음... 사체가 되어서도 예쁠라고요."
분홍색 매니아인 여섯 살 소녀의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연말에 우리 가족은 수연이를 위해 양평 "소나기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징검다리도 건너보고, 소녀와 소년이 비를 피했던 수숫단 속에 기어들어가보기도 했습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수연이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기념관 안에 들어가 황순원 할어버지에게 편지도 썼습니다.
수연이가 얼른 접어서 편지함에 넣어버려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소녀와 소년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그림 같았습니다.

소나기 마을 수숫단 속에서, 네 살 준영이와 여섯 살 수연이.
▲ 소나기 마을 수숫단 속에서 소나기 마을 수숫단 속에서, 네 살 준영이와 여섯 살 수연이.
ⓒ 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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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마을, 수숫단 속에서, 여섯 살 수연, 네 살 준영. 준영이는 수숫단이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에서 첫째 돼지가 만든 볏짚단집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일곱 살이 된 수연이의 관심은 <호두까기 인형>으로 옮아갔지만
수연이는 지금도 <소나기>를 자기 책장 첫번째 칸에 꽂아두고 있습니다.

저도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요즘 이 나라의 유아들은 영어영문과 학생들입니다.
어느 유치원을 가나 원어민 선생님이 있고,
엄마들은 무슨 영어책을 읽혀야 할지 늘 고민입니다.
수연이도 영어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영어책은 수연이의 감성을 깊이 건드려주지는 못했습니다.
번역된 동화책들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된 우리동화, 우리소설만의 깊이와 감성을 수연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제 첫번째 도전은 성공이라기보다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으면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소나기 마을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날 또 수연이는 무얼 보고 마음속에 무얼 그려넣을지 궁금합니다.


태그:#소나기, #황순원,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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