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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새해가 밝았다.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의 해, 2010년이다. 밀레니엄으로부터도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하지만 그 60년의 세월, 백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신성한 학교, 신성한 교육이다.

예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새해 바로 전날 방학식을 한 내 동생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 그랬다. 12월의 마지막 주,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고 정말 냉혹한 추위의 한 주였는데도 동생은 그 흔한 오리털 점퍼조차 걸치고 가지 못했다. 얇은 내복 한 벌에 더욱 얇은 블라우스, 그 위에는 아크릴 조끼, 그리고 마이 한 장을 걸치고 그 추운 겨울날 학교에 갔다. 열다섯 어린 동생이 혹독한 겨울 추위에 외투 한 장 걸치고 가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교복 위에 사복을 입을 수 없다는 '학교의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땀이 날 때나 아플 때나 대한민국의 중고생들은 모두 똑같은 옷, 교복을 입는다.
▲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옷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땀이 날 때나 아플 때나 대한민국의 중고생들은 모두 똑같은 옷, 교복을 입는다.
ⓒ 윤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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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동생네 학교의 중학생들은 까만 교복을 입고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여학생들은 맨다리까지 드러내며 꽁꽁 언 육교를 찬바람을 헤치며 건넜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만난 중학교 3학년 시절 친구들과의 어색함은 중학교 때 맞았던 온갖 부위에 대한 기억들, 학교에서 받았던 별 희한한 벌에 대한 우스움,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기상천외한 욕들로 금세 풀어졌다.

학교는 신성한 곳이다. 신성한 교육을 실현시키는 장인 학교는 매우 신성한 곳이다. 각종 차별과 폭력이 비인간적인 행위로 아주 당연히 취급 받는 지금, 한창 피어날 청소년들을 추위에 벌벌 떨게 하고, 벌점이 쌓이면 강당에 가두어 밤이 깊도록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머리 긴 학생들에겐 개의치 않고 온갖 욕들을 퍼붓고, 금연교육이라 하여 엉덩이가 터지도록 매를 때리는 한국의 학교들을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아니, 건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응원해준다.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인간적인 도덕을 이토록 깡그리 무시하고, 그러고도 간섭 하나 안 받는 이 곳, 정말이지 이 땅에서 가장 신성한 유일한 곳이 바로 학교인 것이다.

청소년행동단체 아수나로에 올라온 사진. 이제는 너무 흔해져버린 풍경이다.
▲ "이런 거 한두 번인감?" 청소년행동단체 아수나로에 올라온 사진. 이제는 너무 흔해져버린 풍경이다.
ⓒ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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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른 무한경쟁을 위해 그 어느 곳보다도 신성하다. 그 신성함으로 청소년들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그게 너무나도 당연시되고 있다. 교사들에게도, 학부모들에게도, 심지어는 청소년 본인들에게도. 그래서 청소년기는 '좀 만 버티면 되는' 6년의 입시준비기간으로 전락해버렸다. 밀레니엄이 펼쳐지고 지난 10년 동안 이는 너무나도 냉정한 사실로 자리 잡고 말았다.

대한민국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연히 겪어보았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
▲ 청소년 인권침해 실태 대한민국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연히 겪어보았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
ⓒ 국가청소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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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2월의 마지막 주보다도 더 혹한 추위 속의 우리 교육 현실에서, 한 가닥 희망의 길을 비춰주는 소식이 2009년과 2010년의 경계 속에서 새어나왔다. 바로 경기도교육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 인권조례'다. 경기도 청소년 인권조례는 지난 5월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각종 인권조례에 관한 연수, 청소년 인권 현실에 대한 탐색, 청소년 주최의 기획단 모집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 이제 떳떳한 초안이 나왔다.

"이 조례는 「헌법」 제31조, 「유엔 아동권리에 관한 협약」, 「교육기본법」 제12조 및 제13조, 「초ㆍ중등교육법」 제18조의4에 근거하여 학생의 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맨 처음에 밝히고 있는 조례의 목적이다. 청소년 인권 보장의 목적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헌법과 유엔 아동권리 협약, 교육기본법 등의 목적과 상통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곧 청소년 인권의 훼손은 헌법, 유엔 협약, 교육법에 대한 훼손임 역시 보여주고 있다.

조례는 열세쪽에 거쳐 꼼꼼하게 청소년의 인권 보장을 위한 사안들을 점검하고 있는데, 이 조례가 통과되어 즉시 시행될 경우 적어도 경기도 청소년들의 생활은 아주 획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빈부, 성적, 심지어는 임신·출산으로부터 오는 차별에서 해방되고 모든 체벌과 부당한 징계는 금지될 것이며, 강제야자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머리 길이에 간섭받지 않을 수 있으며 이름표를 마이에 박음질하지 않아도 되고, 교내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 뿐만 아니다. 교원 및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이 의무적으로 열리게 되며 정기적인 인권실태조사와 청소년인권심의위원회도 설치된다.

그리고 이 조례에 나온 사항은 사실 조례로 지정되지 않더라도 지켜졌어야 할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할, 지금 우리가 정상적인 문명생활을 하고 있고, 인간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앞서 보호받아야 할 '가치'들이다. 이런 가치들을 2010년이 되어서야 조례로 제정해야만 지킬 수 있는 이 나라에서 과연 어떤 신성한 교육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자유시장경제의 논리? 무한경쟁의 논리? 오직 그것들을 위한 신성한 교육으로 어떻게 진정 신성한 학교가 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 조례의 모든 사항이 실현되는 학교, 그런 학교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장이며 진정 신성한 곳이다.

2010년, 누구나 다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인간으로서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진정 행복한 2010년을 맞고 싶다면, 한국의 교육에 있어 밀레니엄의 지난 10년을 값지게 끝맺고 새 출발을 하고 싶다면,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가 미소 지으며 돌아오길 바란다면, 한국의 모든 인권단체들, 학부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청소년들은 올 2월 조례안 통과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자. 우리의 학교를 왜곡된 신성함에서 해방시키자. '진짜'로 신성한 학교를 만들자. 우리 청소년들은 항상 불거지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엄연한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다.


태그:#청소년, #인권, #경기교육청, #청소년인권, #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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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인 거북목 때문에 힘들지만 재밌는 일들이 많아 참는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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