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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로 한 시민이 들어서고 있다
▲ 용산 남일당 분향소 분향소로 한 시민이 들어서고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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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오후 용산 남일당 분향소에는 여전히 향 연기가 꼬리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지난 1년 가까이 수많은 시민들이 눈물과 분노를 머금고 분향소를 찾았다. 협상은 타결됐지만, 남일당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2009년 마지막날에도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 모든 사람들이 열사가 되길 바라겠나"

참사 현장을 둘러보던 한 시민(65·대학교수)은 용산참사범대위 관계자들이 골목 곳곳에 피워놓은 군불을 발견하자, 가까이 다가가 추위에 언 손과 발을 녹였다. 그는 이전에도 용산 참사 현장을 찾은 적이 있지만 이날은 특별히 부인과 함께 분향소를 방문했다.

"저 사람(부인)이 해가 바뀌기 전에 꼭 와봐야겠다고 해서 왔어요."

멀찌감치 서 있던 부인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용산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유족 측이 모두 투사가 되길 기대할 순 없잖아요. 이런 식으로 타협하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걸 안하고…. 근데 이 사람들도 일상생활이 다 있는 민중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이 다 열사가 되길 바라겠어요. 그걸 이해해 줘야지."

또 다른 분향객인 박은선(30·화가)씨도 이번 협상 타결 내용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언론에서 마치 유가족들이 보상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여태까지 기다리고 용을 썼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가장 중요한 건 누가 어떻게 해서 발화가 시작됐는지 밝히기 위해 빠진 3000쪽의 수사기록을 공개하는 것이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재개발 관련 법을 잘 만드는 겁니다. 이런 것은 해결이 안 됐는데 그냥 다 해결된 것처럼 쇼를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어요. 물론 유가족들이 합의를 하셨다니까, 완전히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는데,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됐다는 데에서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레아 갤러리'에 모여 미사로 쓰일 등을 설치하고 있다.
▲ 미사 준비 중인 사람들 사람들이 '레아 갤러리'에 모여 미사로 쓰일 등을 설치하고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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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에는 추운 날씨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어려운 발걸음을 한 이도 있었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거절하던 50대의 이아무개씨는 오늘 용산을 찾게 된 이유를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진작부터 너무나 오고 싶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몸이 아프고 사정이 있어서 못 왔어요. 늘 그게 죄의식으로 남아 있어서 오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침 정부 발표가 있었고, 미진하긴 하지만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꼭 오늘 오고 싶었어요. 이게 시작이죠.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가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용기 내서 싸우시는 데 힘이 됐으면 해서 찾아왔어요."

더불어 그제 타결된 협상에 대해서도 "늦었지만 다행"이라며 반겼다.

"'이제 타결의 실마리를 틔우려 하긴 하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저는 정부가 귀머거리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줬잖아요. 그런 것들이 이제 통해서 갈 길은 멀지만 일이 풀리기 시작해 연말에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제2의 타워팰리스'에서 용산을 지켜본 사람들..."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용산 남일당 건물 골목에 들어서면 뒤편으로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남일당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C아파트는 '제2의 타워팰리스'로 불리며 2004년 분양 당시 최고 69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입주 직전에는 최고 14억 원의 웃돈이 붙기도 했고 최상층에는 303m²(92평형) 크기의 펜트하우스도 있다. 2009년 12월 26일을 기준으로 69평 전세가 7억 3천만 원, 매매가 24억 원 수준의 매물이 나와 있었다.

남일당과 주거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C아파트 주민들, 그들은 지난 1년간 용산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C 아파트 단지 중에서도 조망이 좋다는 2단지를 찾았다. 저녁 미사 준비에 분주한 남일당 골목과 달리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고, 아파트 입구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성탄 전등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앞을 몇 몇 주민들은 옷깃을 여민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다.

용산참사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층에 사는 50대 중반의 한 주민은 인근 동네 이웃으로써 가졌던 안타까움을 먼저 드러냈다. 그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생각은 이랬다. 

"공권력이 좀 무리하게 진압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해요. 거기에 정부가 대응하는 방식도 적절하지 못했던 것 같고. 또 (정부가) 유가족과 문제를 풀려는 노력들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불편하죠. 우리도 불편하죠. 동네 주민인데 그런 일이……. 그런 비극이 일어났으니까. 같은 동네 살면서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용산참사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마음이 좀 편해졌달까요? 늦었지만 그래도 연초에 유가족 분들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오른쪽 건물이 남일당,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C아파트 단지
▲ 남일당과 C주거복합단지 제일 오른쪽 건물이 남일당,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C아파트 단지
ⓒ 허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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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멀리서 용산참사 현장을 지켜본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만난 주민 이아무개씨(61)는 다른 견해를 드러냈다.

"저는 이게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쪽의(유가족 측의) 저걸(요구를) 들어주면……,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인가 하는 사람들이 개입돼 있고, 그 사람들이 개입해서 일이 저렇게 커졌는데, '다음에 또 요구하면 어떻게 할 건지'하는 생각이 들어요."

용산참사가 발생한 원인과 협상 타결까지 345일이 걸렸던 것에 대해서도 이씨는 다른 의견을 나타냈다.

"(철거민들은) 안됐지만, 자기네 주장을 너무 강렬하게 표현했지. 시간을 가지고 대화 쪽으로 끌고 나가야지. 구태여 그런 단체까지 끌어들여서 하는 건 좀 지나치다고 봐요.

(협상이 지연된 것도) 자기네 주장을 끝까지 고집해서 그런 거지. 오히려 외부 단체가 개입되지 않았으면 일이 간단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도 처음에는 (분향소에) 가서 절하고 돈도 만원이나 넣고 그랬어요. 그런데 전철연이 연관됐다는 거 알고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덮어버리는 것 같다"

정부 대응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는 주민도 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송해숙(38)씨는 용산참사 해결 방법과 결과에 대한 전반적인 아쉬움을 드러냈다.

"일단 빨리 해결했었어야 되는데, 너무 시간이 늦어졌어요. 유족들 입장에서는 지금이라도 해결돼서 다행이긴 한데…….  그냥 급하게,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고 눈가림 하는 식으로……. '정말로 자기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이런 것 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게(용산참사가) 눈엣가시처럼 돼버리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덮어버린 것 같아서…….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송씨는 이어 "용산참사는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며,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1년 동안) 항상 봐왔죠. 맘이 아프죠. 왜냐하면 지금은 그 사람들의 일이지만은 나중엔 내 일 일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거니까.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할 때, 계획을 하고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막무가내로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철거중인 건물로 둘러싸인 남일당 골목과 달리 깨끗이 정돈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때쯤 2009년의 마지막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지난 1년 가까이 용산참사 현장을 많은 이들이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분향소를 찾았고, 다른 누군가는 높은 아파트 위에서 커튼을 걷을 때마다 용산참사 현장과 마주했다.

용산을 바라본 이들의 생각은 제각기 달랐지만 용산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그 과제는 아직 분명히 해결된 듯 보이지 않는다. 2009년의 해는 저 편으로 졌지만, 용산을 '2009년의 일'로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박혜경 기자는 11기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용산, #남일당, #제2의 타워팰리스, #용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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