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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판매점에서 한국의 소주를 취급하고 있다. 다른 주류 광고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있는 한 주류 판매점 주류 판매점에서 한국의 소주를 취급하고 있다. 다른 주류 광고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 이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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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소속된 곳(그게 나라든, 단체든)에서는 '그곳'이 얼마나 특이한지, 혹은 특별한지 느끼기가 쉽지 않다.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외국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는 익숙했던 무엇이 외국인들에겐 특이하게 여겨짐을 알게 됐을 때다. 나 또한 교환학생으로 뉴질랜드에 4개월 넘게 있으면서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의 소주 광고다.

우리가 음식점이나 마트 벽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주 광고에는 대개 당대의 매력적인 여성 스타가 등장한다. 이효리, 성유리, 신민아, 김태희, 한지민, 그리고 최근에는 유이까지. 섹시한 의상과 포즈와 함께 '같이 한잔 하실래요'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는 수도는 아니지만 가장 크고, 경제활동이 집중된 도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호주 시드니와 비슷해서 시드니의 작은 버전(small version)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한국인이 많아서 그런지 주류 판매점을 지나다보면 한국의 소주광고 포스터를 볼 수 있다. 물론 여러 나라의 다양한 주류 광고 또한 같이 붙어있다. 그래서 각각의 광고를 비교해볼 수 있는데, 한국의 소주 광고는 독특하다. 야한 원피스를 입고, 소주 한 잔 들고 섹시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한국 소주광고 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대부분 광고들이 서로 엇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느 회사의 어떤 브랜드를 광고하는 것인지 조차 알기 어렵다. 교환학교에서 한국의 소주 광고를 주제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의 다양한 소주 광고를 보여주고 같은 브랜드끼리 묶어볼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했었다. 당연히 정답을 말한 학생은 없었다. 그들에겐 모델들마저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한국의 소주 광고는 그만큼 정형화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회사의 다른 광고들이지만 같은 광고라 해도 될만큼 비슷하다.
▲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한국 소주 광고들 다른 회사의 다른 광고들이지만 같은 광고라 해도 될만큼 비슷하다.
ⓒ 이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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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친해진 한 현지인 아저씨가 내게 한국과 뉴질랜드의 음주문화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해준 적이 있었다. 이 아저씨는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 친구가 많아서 한국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분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술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반면 한국인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 같다고 했다. 주변 한국인 친구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는 것 같다는 것. 아저씨는 뉴질랜드에 비해 치열한 취업 경쟁, 학업 경쟁, 생존 경쟁 등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듯도 했다. 바(bar)에서 술과 함께 럭비를 보며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확실히 즐기고 있는듯 했으니까.

한국인들에게 소주를 포함한 술은 좌절된 욕망을 잊게해주고, 달래주는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어릴 때부터 성적순으로 가치의 우열이 부여된 우리에게 좌절, 열등감 같은 감정들은 지독한 트라우마다. 그리고 성인이 돼서는 대학, 연봉, 자동차, 부동산 등 여러 기준에 따라 한국인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항상 평가해본다. 그 후에 남는 것은 대부분이 좌절과 절망, 그리고 열등감이다.

어느 기준에서든지 1등은 한명 뿐이고, 대부분의 나머지는 1등이 되지 못한 패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렇게 술을 마셔대는 것이다. 의사나 배관공이나 연봉 차이가 크지 않아서 무슨 일을 하든 크게 차별받지 않은 뉴질랜드와는 분명히 다른 환경에 우리는 있다.

2차, 3차... 그렇게 마시다 보면 한국인들은 좌절된 욕망을 잊게 되고, 무언가를 정복함으로써 자신감을 채우고자 한다. 집장촌, 안마방 같은 성매매 업소의 여성들이 그들의 정복 대상이다. 힘없는 여성들을 정복해서라도 자아도취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 술은 마실 수밖에 없는 신경안정제인 셈이다.

이렇게 봤을 때, 왜 그렇게 소주 광고가 천편일률 적으로 똑같은 패턴인지 알 수 있다. 광고에 나오는 매력적인 여성 스타들은 한국 남성들이 겨우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의 성적 은유인 셈이다. 광고대행사들이 무능하다거나 게으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소주를 마시는 이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광고 모델들이 가진 성적 매력은 그것이 은유하는 대상을 자극하도록 정교히 디자인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최선의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라는 앱솔루트 보트카 잔에 얼음을 넣고 있는 재기 넘치는 광고
▲ 앱솔루트 보드카 광고 중의 하나 지구라는 앱솔루트 보트카 잔에 얼음을 넣고 있는 재기 넘치는 광고
ⓒ 이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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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n absolut world', 지구는 앱솔루트 보드카가 담긴 잔이고, 그 위에 얼음을 띄우는 재기 넘치는 광고이다. 앱솔루트 보드카 광고 답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한국 소주 광고에서도 이런 창의력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때는 한국 사회가 좀 더 여유로워지고, 좀 더 평등해진다면 올 수 있는 날일게다.


태그:#소주, #광고, #뉴질랜드,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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