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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은 봄 여름 가을과 달리 묘미가 있다. 추위와 더위가 공존하고 다른 계절에 비해 산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중국에 있는 산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 11월 중순 한낮의 기온이 영하 2~3도를 오르내리고 있는 날, 우리는 베이징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지방도로를 달렸다.

 

베이징과 청더(承德)를 잇는 징청(京承)고속도로(G101)를 달리다가 화이러우(怀柔)구 번화가를 거쳐 산길로 접어든다.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높게 자란 가로수에는 낙엽 몇 개만 남긴 채 앙상했다. 베이징 외곽 산길 도로는 언제나 한적하다. 지방도로(S213)인 안쓰루(安四路)를 따라 수(水)장성이라 불리는 황화청(黄花城) 마을을 지났다.

 

이 마을은 창청(长城)의 군사요충지(军事重镇)로서 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얼다오관(二道关)이라고 한다.

 

보통 이 '관'을 관문이라는 뜻으로 산하이관(山海关)을 시작한 만리장성이 자위관(嘉峪关)에 이르는데 두 곳 모두 관청과 함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큰 관청만도 수십 개에 이르지만 이렇게 얼다오관처럼 그 규모가 작은 곳도 있는 듯하다.

 

다시 20여분을 더 북쪽으로 달리면 린룽산(鳞龙山) 입구에 도착한다. 린룽산의 '린'은 비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용의 비늘을 닮은 산이라는 것이다. 산의 모양새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이다지도 멋진 이름을 얻었을까 궁금해졌다.

 

날씨가 추워 등산객이 한 명도 없다. 린룽산 입장료가 15위엔인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무사 통과했다. 생각해 보니 중국 수없이 다녔지만 입장료 내지 않기는 처음이다. 겨울 산에 오니 이런 재미도 있다.

 

높게 솟은 기둥 위로 빨간 깃발 두 개가 나부끼는 입구를 유유히 통과해 들어가니 파란 하늘이 너무나도 싱그럽다. 하늘에 물감을 뿌린 듯 시원하다. 그런데 가까운 곳의 산 봉우리에 비해 유난히 하얀 색깔로 우뚝 솟은 산 봉우리가 나타난다. 바로 저 곳이 린룽산의 정체인가 보다. 양쪽 산이 브이(V) 자로 넓게 펼쳐진 사이로 온통 바위로만 이뤄진 산이 불쑥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시야를 심심하지 않게 서 있다.

 

바로 눈 앞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한 산이건만 실제로는 무려 3시간 가까이 산행을 해야 하는 먼 곳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워밍업이고 그 뒤로 또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산이 또 나타난다.

 

등산로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살짝 쌓여있다. 길 옆으로 제 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뻗어있다. 호흡을 할 때마다 쾌청한 산 공기가 폐로 들어가니 온몸이 시원하다. 그렇지만 점점 올라갈수록 땀이 솟기 시작하더니 주르르 흐르기도 한다.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자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멈추면 금새 땀은 얼 듯이 굳어진다.

 

햇살도 아주 강렬하다. 나뭇가지를 비추고 그 그림자가 커다란 바위 위에 검은 자국을 내고 있다. 나무 그림자가 이렇게 멋진 무채색의 언어를 가지고 사람 앞에 나타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나무는 위로만 자라는 것인 줄 모르는 사람 없겠지만 그림자가 되어 나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며 잠시 멈춰 섰다.

 

바위에 톈티(天梯)라는 표시가 있는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동그란 바위들이 한데 뭉쳐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다리와도 같다. 그래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라 이름을 붙였겠지만 말이다. 산 위에도 바위가 많지만 등산로 주위에도 멋진 바위가 많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서 비나 눈을 피해도 될 정도로 넓은 지붕바위도 있고 뒷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넓은 마당바위도 있다. 가까운 곳에는 나무와 눈, 그리고 바위. 먼 곳에는 산 능선과 하늘, 구름이 일사천리로 눈을 시원스레 만들어주는 멋진 산행이라 할 수 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해 30분이 지나니 점점 주변 경관이 넓어지고 산 능선을 둘러싸고 있는 멋진 바위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징신핑(静心坪)이라 이름 붙은 평지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오른쪽으로 봉긋하게 바위 하나가 홀로 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바위 뒤로는 구름이 산을 넘어가는 듯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뒤쪽으로는 하얀 색깔의 거대한 암석들이 병풍처럼 뿌리박고 있다. 저 병풍처럼 둘러쳐진 봉우리를 넘어가야 하는 듯하다. 3시간 일정으로 왔는데 이제 1시간 30분이 지났으니 이제 겨우 반 정도 온 셈이다.

 

이곳 평지에는 신기하게도 우리가 흔히 똘배라고 부르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많이 있다. 겨울철에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똘배가 아주 많다. 목도 마르고 맛도 볼 겸해서 낮게 자란 나무에서 똘배 하나를 따서 맛을 봤다. 약간 시큼하지만 물기가 아주 많아서 그런대로 시원한 맛으로 먹을 만하다. 영하의 날씨라 똘배는 겉은 얼었고 속은 물렁물렁하다. 살얼음과 달지 않은 포도를 먹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하얀 린룽산 봉우리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동글동글한 똘배들을 화면에 담으니 아주 예쁘다. 비록 한겨울에 사람들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지만 예쁘게 사진 속으로 들어온 모양만으로도 린룽산에서 가장 친근한 동무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여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과와 배가 접붙여서 만들어진 핑궈리(苹果梨)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배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가진 듯하다.

 

이 똘배는 중국어로는 야생 또는 산에서 난다고 해서 산리(山梨) 또는 가을에 맺는 배라는 뜻으로 츄즈리(秋子梨)라고 부른다. 돌배라고도 하는 이 똘배는 약용으로도 널리 사용된다고 한다.

 

산 중턱 평지에 군집처럼 자란 이 야생 똘배나무들이 가을을 넘기면서 등산객들의 손과 입으로부터 무사하게 견뎌 왔다는 것도 참 다행이다 싶다. 아니면 사람들이 등산을 자주 하는 계절에는 열매가 더 익었거나 먹어도 그 맛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가파르게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오르기 편하도록 쇠사슬이 있는 곳을 쒀챠오(索桥)라고 한다. 쇠사슬을 잡고 오를 정도로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길이면서도 점점 좁아지는 계곡 길이다. 미끄럽기도 하지만 햇살이 더 이상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지 않고 싸늘한 음기와 냉기가 이어진다.

 

드디어 오늘 목표로 한 곳이 가까워진다. 눈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니 막다른 암석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 가파른 절벽은 다름아닌 낙차가 6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폭포이다. 날씨가 추워 물길이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사자머리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스터우폭포(狮头瀑布)이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고인 곳은 샹후(响湖)라고 부르는데 메아리 소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니 아마 멋진 폭포수 소리가 날 것 같아 보인다. 호수 주위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 있다. 초록 갈대 잎이 겨울이라 회색 잎으로 변했고 뻗지 못해 흐느적거리긴 해도 폭포 앞에서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봄과 함께 다시 굉음처럼 떨어질 폭포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폭포 앞에서 좀더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날씨가 춥다. 음지이다 보니 채 10분이 되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꽁꽁 얼 듯하다. 원래는 이곳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할 요량이었지만 우리 일행 모두 이구동성으로 '샤취바(下去吧)', 내려가자고 한다.

 

아래로 30분 가량 내려가니 양지 바른 곳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큰 바위에 긴 고드름 하나가 길게 달렸다. 싸온 김밥과 떡, 그리고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 하나씩 먹었다. 그리고 커피까지 한잔 하니 몸이 조금 따뜻해진다. 종이봉투에 쓰레기 깨끗하게 챙기고 다시 길을 내려갔다.

 

항상 산을 오를 때와 내려갈 때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더구나 파란 하늘이 너무 아름다운 하산은 자꾸 발길이 멈춰 선다. 정말 린룽산의 하얀 바위 군집과 하늘은 아주 멋진 조화다.

 

산길을 오를 때 몰랐던 재미난 것이 하나 있다. 너럭바위에 암화(岩画)가 있다는 팻말을 읽어보니 굴원(屈原)이 등장한다. 전국(战国)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의 시 <구가(九歌)>에 나오는 '산귀(山鬼)'의 모습을 닮은 그림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신비로운 미인으로 산중에 살았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는데 아쉽게도 바위에 온통 눈이 뒤덮여 있어 볼 수 없었다.

 

후베이(湖北) 출신으로 초나라 사람인 굴원이 이곳 베이징 외곽 린룽산과 그 어떤 인연이 있을 리 없건만 산에 사는 귀신처럼 품위 있는 미인을 연상시킨다고 하니 바위 속 그림이 더욱 궁금해진다. 온 눈을 다 당장 녹여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

 

 

바위산 린룽산과 멋진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잠시 여유도 부려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아있는 낙엽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한쪽 구석에 햇살에 반사돼 더욱 빛나는 갈대 숲이 펼쳐져 있기도 하다.

 

산을 오를 때의 설렘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린룽산이 주는 독특한 느낌 때문이다. 볼수록 특이하고 정이 간다. 여전히 파란 하늘 속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멋진 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13억과의대화 www.youyue.co.kr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이징, #만리장성, #린룽산,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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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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