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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마냥 좋았던 9남매 막둥이

    

암울했던 시기 소년에게 찾아온 사진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갈산동에서 올해로 32년째 사진관(현대포토 스튜디오)을 운영하고 있는 김봉식(54)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을 공포한 뒤 또 다시 독재정권의 서막을 알리는 유신체제 직전인 71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접했다.

 

전남 해남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에게 카메라는 세상을 담는 눈이자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고, 저마다 지니고 있는 휴대폰에는 대부분 카메라가 내장돼 있어 어딜 가나 카메라는 흔한 물건이지만 당시 카메라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김씨는 열다섯이었던 중학생 때 학교에서 취미활동으로 카메라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스무명 남짓한 학생들과 같이 카메라를 배우기 시작한 것. 나중에 3명 정도만 남았고, 현재는 김씨만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그 때는 모두가 사진에 심취해있었다.

 

그는 "카메라가 없으니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서로 돌아가면서 촬영하곤 했다. 필름카메라라고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필름카메라가 아니었다"며 "사진을 찍는 방식은 디카나 필름카메라, 그전 필름카메라 모두 원리가 같다. 지금은 모든 게 자동으로 이뤄지지만 내가 배울 땐 필름에 상이 맺히면 사진에 알맞은 노출량을 조절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빚을 차단해야했다. 그렇게 사진을 처음 배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사진을 접한 김씨는 학업과 돈벌이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중학교를 마친 후 인천에 있는 야간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도 일도 그에게는 사진만큼의 재미를 주진 못했다. 그의 사진기술은 이 시기에 거의 완성됐다.

 

김씨는 "집에서 막둥이다. 부모님과 누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렇다고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막둥이라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며 "결국 누님들을 졸라 '캐논QL'이라는 필름카메라를 처음 장만했다. 필름카메라가 수중에 들어오니 그 다음부턴 얼마나 세상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겠냐"고 웃으며 말했다.

 

여심을 홀렸던 70년대 '뽀샵'

 

필름카메라를 얻은 김씨는 사진을 독학으로 배우는 와중에도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 일러준 공식을 잊지 않았다. 그 공식을 지금도 외우며 사용하고 있고, 사진 강의를 나갔을 때 배우는 사람들에게 꼭 외우라고 일러주고 있다.

 

그는 "지금도 외부 날씨에 따라, 실내 빛의 양에 따라 사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 값을 금방 산정할 수 있는데, 이는 다 그때 외운 덕분"이라며 "햇빛이 많은 맑은 날은 셔터 스피드 125(125분의 1초라는 뜻)에 조리개 값은 11이 적당하고 석양이 질 때는 60에 8이 적당하다"고 설명했다.

 

[김씨의 사진촬영 팁(셔터 스피드-조리개 값)]

눈이나 물에 빛이 반사될 때 (250 - 11)

맑게 흐린 날 (60 - 8)

흐리게 흐린 날 (60 - 5.6)

비오는 날 (30 - 8)

비오는 날 어두울 때 (30 - 5.6)

실내 스트로브 없을 때 (30 - 2.8~4)

실내 스토로브 있을 때 (30 - 근거리 8 / 원거리 5.6)

움직이는 피사체 (500 - 4 / 1000 - 2.8)

 

그는 이 사진공식을 설명한 뒤 "지금도 이 공식은 유효하다. 디지털카메라도 수동모드가 있다. 사진은 정성을 들이면 그만큼 더 잘 나오게 돼있다. 그러니 자동보단 수동이 더 나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공식을 외워두는 게 좋다"며 "특히 인물사진 찍을 때 250에 11이나 125에 11을 쓰는데, 단체사진은 250에 11이 적당하다. 이는 30년 현장의 노하우를 전해주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옛날 필름카메라도 귀했지만 그 중에서도 칼라사진은 더욱 귀했다. 그래서 김씨가 고안해 낸 방법은 당시 여학생들에게 상당한 인기였다. 김씨 나름대로 요즘 익히 사용되고 있는 포토샵 기술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고 난 뒤 당시 여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였냐면 바로 얼굴, 그중에서도 눈썹과 입술이었다"며 "그래서 문질렀다. 문지른 뒤 약간 색을 입히고 눈썹은 가지런히 모아준 뒤, 입술은 문지른 위에다 살짝 색을 입혔다. 여학생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랐다"고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쉽게만 하려고 하는데, 그럼 안 늘어"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만해도 그는 시대는 암울했을지 모르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도 군대에 가야 했고 군에 다녀온 뒤 앞에 놓인 것은 이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가 버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사진이라, 유신체제가 종지부를 향해가던 78년 청천동에 처음 사진관을 냈다. 그리고 이듬해 갈산동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에 이르렀다. 그동안 <동아일보> 사진 콘테스트에 입선도 했고, 한국프로사진가협회 사진전에 출품해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사진 일을 하다 보니 그의 가게에는 사진을 배우러 오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학생들도 포함돼있었는데, 너무 쉽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그는 "사진이 정말 예술이라면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한다. 자동촬영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맞춰서 하라고 했더니 그래도 안 하더라"라며 "쉽게 하려고만 하면 사진은 절대 늘지 않는다. 장비가 변해도 아날로그는 살아있다. 그리고 곧 아날로그가 좋다는 것이 확인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정년이 없다고 말하는 김씨는 셔터를 누를 힘만 있으면 카메라를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사진을 찍고 나면 잘 찍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예나 지금이나 사진을 찍고 난 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담을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날까지 셔터를 누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사진, #디카, #30년 부평지킴이, #갈산동,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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