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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 12시. 아들녀석이 울기 시작한다. 얼마 전 돌잔치를 한, 만 12개월의 꼬맹이다. 아직 걸음마도 못하지만 하루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무하고나 잘 노는 이 녀석이 유일하게 아빠를 거부하는 시간은 밤에 자다 깼을 때다. 이제 이유식이 주식이 됐지만 아직 젖먹던 습관을 못 버려 이 시간에 깨면 엄마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엄마가 없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애엄마는 마감기간이라 아직 귀가 전이다. 안아도 주고 좋아하는 장난감도 가져다 주고, 비장의 '뻥과자'까지 안겨 줬지만 울음을 그칠 생각도 않고 엄마만 찾는다. 결국 한 시간 정도를 안고 어르고 달랜 끝에 재우기에 성공했다.

둘째 계획은 무식해서 용감했을 때 생각?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버럭 울어주시는 아들군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버럭 울어주시는 아들군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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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였던 우리 부부는 최근 내가 일을 그만 두면서(잠시 쉬며 새로운 일을 찾는 중이다), 육아의 양이 직장에 나가는 아내의 스케줄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화 한 통이면 내 약속이 취소돼야 하는 불공정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날도 애 엄마의 마감이 주말과 겹쳐 어린이집에도 못 보내고 꼬박 이틀 동안 애를 봐야했다. 아이를 갖고 기르는데 예정된 시간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애가 돌이 지난 지금이 우리 부부가 결혼하면서 생각했던 둘째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다.

직장과 이런저런 사회 활동이 많은 우리 부부는, 결혼 즈음 한 선배에게 들은 조언 "일찍 애를 낳아서 길러놓고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사회 생활에 복귀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공감한 바 있다. 그래서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둘째를 갖는다면 터울을 많이 두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부부는 둘 다 둘째 계획을 쉽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아내의 속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결혼 초기 둘째에 긍정적이었던 아내의 태도가 슬슬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아내가 하고 있는 일의 양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나 역시 애는 둘 이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강한 의지가 없다. 출산과 육아의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 여성보다야 덜 하겠지만, 육아는 남성들 특히 맞벌이 부부의 남성들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염치가 있지, 둘째까지 어떻게 할머니에게

맞벌이 부부니까 경제적 부담은 함께 지더라도 남성이 받는 사회적 부담감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혼자 버는 친구들을 보면 이런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
 맞벌이 부부니까 경제적 부담은 함께 지더라도 남성이 받는 사회적 부담감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혼자 버는 친구들을 보면 이런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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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의 출산률이 세계 꼴찌 수준이라는 기사가 났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익숙한 저출산 기사들을 보다가 생경한 이야기를 읽은 것은 댓글을 통해서였다. 왜 여성이 출산을 기피하는가에 대한 글이었는데,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여성에게 몰면서도, 이 부담 때문에 생기는 저출산의 책임 또한 여성에게 묻는 묘한 논리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비정규 일자리와 낮은 임금 때문에 맞벌이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출산과 육아의 문제는 여성만의 문제도 남성만의 문제도 아닌 가족의 문제다. 맞벌이 부부의 육아에는 당사지인 아빠, 엄마 외에 어린이집 그리고 할머니까지 등장한다.

우리 부부의 경우에도 집 근처에 사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자식들 사정을 봐서 아이를 돌봐주고 있다. 상당수 맞벌이 부부들이 육아를 함에 있어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고, 이 과정에서 '생활비'라는 명목의 금전거래가 이뤄진다. 또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경우, 자식들 사이에서는 '누구 애는 봐주고 누구 애는 안 봐준다'는 식의 가정불화도 더러 생기곤 한다.

이렇듯 육아에 가족이 동원되는 데서 따르는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둘째를 낳고 난 이후, 늘어나는 육아의 양도 부담스럽고 이미 두 딸의 첫 애들을 돌봐주신 장모님에게 둘째 아이까지 부탁할 염치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첫 애의 출산 때는 이런 사정을 몰라서 용감할 수 있었지만, 둘째 문제에서는 아무래도 소심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둘째 이야기는 가슴에 묻고 저출산에 일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출산을 여성의 문제로 폄하하며 '여성이 출산을 기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자녀 출산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사람들일까?

둘째는 '지출가능한 비율을 넘어선 비용'

육아비용은 일정액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한도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키우기 위한 '가계소득 중 지출가능한 비율'이 되어 버린다.
 육아비용은 일정액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한도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키우기 위한 '가계소득 중 지출가능한 비율'이 되어 버린다.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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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감과 책임감을 떠안고 용기를 내도 넘어야할 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경제적 부담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부담은 생각보다 해결하기가 훨씬 어렵다. '애를 황제처럼 금칠해서 키울 게 아니라면 돈이 얼마나 들겠나?'와 같은, 결혼 전의 무식해서 용감했던 생각은 출산 몇 달 만에 박살났다.

우리 벌이가 적어서 그런가 싶어 주변에 역시 애를 키우는 집들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육아의 경제적 부담이 적다고 말하는 부부는 없었다. 애를 금칠해서 키우는 집, 평범하게 키우는 집, 우리처럼 필요한 것만 맞추는 집을 두루 돌아본 끝에 내린 결론은, '육아비용은 일정액이 아니라 가계소득의 일정비율'이라는 것이다.

먹을거리, 입을거리 어느 하나 믿기 힘든 '불안사회'인 한국에서 유기농과 천연소재에 돈을 쓰는 부모들은 '금칠'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고 있는 것뿐이다. 안전도 혹은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은 욕망이 높아질수록 육아비용은 늘어난다.

결국 육아비용은 일정액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한도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키우기 위한 '가계소득 중 지출가능한 비율'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는 '지출가능한 비율을 넘어선 비용'이라는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혹은 첫째에게 보장하던 안전도를 하향조정해야 하는 선택이 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선뜻 결정하기도 힘들고, 저임금 사회에서는 '육아비용을 추가지출 할 수 없는' 이들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벌이가 힘든 부부에게는 가족들마저 둘째 이야기를 못 꺼낸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경제적 책임을 지는 가장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차피 맞벌이고 소득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남성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가족 행사에서는 으레 '애를 잘 키우기 위해 부자되라'는 덕담이 오가고 그 덕담의 시선은 남성인 나를 향하곤 한다.

이런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도 육아비용에 대한 마음 속 부담은 항상 존재한다. 맞벌이 부부니까 경제적 부담은 함께 지더라도 남성이 받는 사회적 부담감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혼자 버는 친구들을 보면 이런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 이래저래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다자녀 출산에 따른 육아비용에 대해 부담이 많고 결국 저출산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

저출산은 여성과 남성, 가족과 국가의 문제

물론, 이런저런 남성의 부담을 다 더해도 여성 특히 맞벌이 부부의 여성의 부담보다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남성과 가족의 부담이 결코 작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육아보조금이나 여성지원정책과 같은 '보조와 지원'책 만으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여성뿐 아니라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남성에게도, 손주의 육아까지 떠안아야 하는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도, 다자녀 출산과 육아가 가능한 사회라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저출산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저출산 문제는 여성의 문제이자 남성의 문제이며, 가족의 문제이자 사회의 문제이고, 국가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다. 이런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못하면 저출산 문제는 요원하다.


태그:#저출산, #맞벌이,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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