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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지키는 사실과 논리를 강조한다'는 <조갑제닷컴>은 시민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콘텐츠로 가득 차 있다. 이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김대중의 정체>, <자폭의 동반자들> 같은 몇몇 도서의 제목만 봐도 이 사이트의 성격을 알 수 있을 정도다.
 
21일 조갑제가 작성한 '민족의 행운: 金春秋, 文武王, 李承萬, 朴正熙' 기사는 신라, 이승만, 박정희 숭배진영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 조갑제의 글들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1000년이라는 역사를 건너뛰어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미화하는 그의 이번 글이 어떤 허구성을 담고 있는지 짚어보자.
 
 

김춘추와 문무왕이 민족탄생을 이끈 장본인?
 

중원을 통일한 국가는 주류 지배층이 한족이든 이민족이든을 막론하고 항상 주변의 이민족을 굴복시키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변방의 이민족 출신이 건국한 수와 당은 자신들의 본래세력보다도 강력한 세를 바탕으로 만주를 지배하던 고구려를 방치할 수만은 없어 국운을 건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결사적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구려가 '한반도의 방파제', '민족의 방파제'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수와 당을 막고 있을 때, 김춘추는 백제가 죽인 사위의 복수를 하기 위해 고구려에 가서 구걸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당을 찾아가 고구려의 배후를 치겠다며

고구려원정을 단행하라고 애걸했다.

 

따라서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의 주민들이 본인을 현대의 민족개념으로 인식했을 리 만무하지만, 현대의 민족개념으로 당시 상황을 거칠게 판단하다면 김춘추와 문무왕을 극찬하는 것보다는 고구려에 대해 우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서, 한반도는 중국의 문화권으로 복속될 위기에 처했다. 당이 곧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을 드러냈고, 고구려와 백제유민들까지 이 침공을 목숨을 걸고 막지 않았다면, 당의 국경선은 한반도 최남단까지 확장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잘나서 한국이 경제발전을 한 것이 아니고 우리 부모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가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이다. 마찬가지로 당에서 볼모 생활을 오래한 문무왕이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민족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삼국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외세에 저항했기 때문에 민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과의 항쟁은 외세의 군사력에 의존한 국가운영이라는 도박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김춘추와 문무왕이 장안에서 무엇을 배웠고 얼마나 훌륭한 외교를 펼쳤는지 모르겠지만, 조갑제가 민족주의자라면 이들을 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정희가 국제감각이 있는 지도자?

 

미국에서 공부했고 더구나 박사학위를 취득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전 총장출신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친교를 맺어 미국내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한 이승만을 국제감각을 갖춘 지식인으로 평가한 것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만주군과 일본군에 들어가 황군이 되기를 혈서로써 다짐했던 박정희를 열린 정신의 소유자로 묘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만주, 소련을 거친 김일성이 소련에 무조건 항복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박정희보다는 선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편이 더 논리적이다. 항상 힘있는 쪽을 따랐던 박정희가 한때는 김일성과 박헌영, 넓게는 소련의 영도에 감화되어 남로당에 입당한 것은 조갑제의 글에 나온 것과 같이 '열린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남한의 사정상 소련보다는 처음부터 미국을 따르는 것이 기회주의적인 그의 처신에 더 이로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가 국제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배운 것이 문경에서의 황국신민교육과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교육, 만주와 일본에서 군사교육과 황국신민의 장교로 거듭나는 방법뿐이라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일제의 모토가 된 '귀축영미'를 바탕으로 한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국제정세 교육을 받은 박정희보다는 차라리 '동양의 수도' 장안에 오랫동안 머문 김춘추의 국제정세 인식이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이 박정희보다 나은 단 한 가지

 

수양제의 무리한 토목공사와 고구려원정이 수를 자멸시키고 수의 신하였던 당고조가 건국한 당이 새로운 중원의 주인으로 거듭난 이래, 김춘추는 당에 충성을 바쳤다. 당에 대한 충성은 그 아들인 문무왕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이 고구려의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전까지, 통일신라의 지배자였던 문무왕은 당에 절대 굴복했다. 한반도에서 당을 몰아낸 일시적인 시기를 제외하고, 문무왕은 다시 당의 제후임을 맹세했고 그 기조를 지켜나갔다.

 

이승만은 어린 나이에 영어학교에 입학한 이래, 죽을 때까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그의 저작을 통해 "이승만이 미국측 인사들에 한국의 여러 이권을 넘겼다"고 했을 만큼 그의 미국사랑은 유별났다. 국민들이 부정선거와 그의 장기독재를 규탄하자 권력을 내려놓고 선택한 망명지도 미국이었다.

 

무열왕과 문무왕이 일관성있게 당에 충성을 바치고 이승만이 대한민국 최고의 친미파로 평생을 다한 것과 달리 박정희는 적어도 세 번이나 자신의 조국을 바꿨다.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작성한 혈서에서 밝힌 조국은 곧 일본이다.

 

반면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내고 미국에 체류할 당시 임시정부의 미국주재 대표임을 자임했다. 즉 조갑제가 어색하게 비교한 이승만의 임시정부가 일본제국주의에 선전포고를 했으므로, 박정희는 곧 이승만의 적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하자 남로당에 입당하며 소련을 자신의 새로운 조국으로 설정했다. '남로당 군책' 박정희의 주적은 그가 전복시켰어야 할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인 이승만이었다.하지만 불행하게도 뜻을 이루기전에 대한민국 당국에 체포당한 박정희는 군에 침투한 남로당 동료들의 명단을 넘기며 자신의 조국을 다시 저버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에는 반공을 내세우며 다시 미국의 이익에 철저히 부합할 것임을 맹세해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렇듯 박정희는 이익에 따라  당적을 여러 번 바꾸는 '철새정치인'들과는 급이 다른, 장구한 우리 역사속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회주의자다. 적어도 박정희는 김춘추와 문무왕, 그리고 이승만에게서 충성심이나 일관성만은 배웠어야 할 것이다.

 

명기자 조갑제의 부활을 기대하며

 

조갑제의 이번 글은 사실상 무열왕이나 문무왕을 띄우기 위한 것보다는 최근 인기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김춘추(유승호분)의 부상에 박정희를 끼워넣어 '혈서지원' 박정희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의도해서 쓰여졌다. 하지만 무리한 역사속 인물들의 비교로는 세간의 비웃음만을 살 뿐이다.

 

당의 신하임을 자처한 신라의 김춘추나, '조국(일본)을 위해 멸사봉공하겠다'며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한 박정희를 무서운 자주정신의 소유자로 지칭한 것은 그의 짧은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무리한 비교를 하면서까지 박정희 띄우기에 매진하는 그 끈기만은 칭찬할 만하다. 다만 그가 혼신을 다해서 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은 것과 같이 국민의 비웃음만을 살 뿐인 역사서술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만 깨달았으면 한다.

 

현재와 같이 규탄의 대상일 뿐인 조갑제를 아는 이들은 조갑제가 어떻게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기자도 단순히 현재같이 망언을 수십년간 꾸준히 해오면서 지명도를 높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한홍구 교수의 <특강>을 통해 그가 70년대와 80년대 군사독재시절의 어두운 면을 발굴하는  여러 특종을 쓴 명기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표적인 특종으로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음을 드러낸 월간조선의 기사가 있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그가 활약했던 70년대를 기억하고 있고, 그가 여기에 연륜을 더해 좋은 기사로 말하는 기자로 돌아오길 기대하고 있다. 세종로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웰컴 오바마 USA"를 연호하는 이들의 우상보다는 명기자 조갑제가 낫지 않겠는가.


태그:#조갑제, #김춘추, #삼국통일, #박정희,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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