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연애세포 멸종에 다다른 그녀들을 건어물녀라고들 한다지요. 자기 일은 열심히 하지만, 사랑에는 소극적인 그러다보니 연애세포가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건어물녀들. 하지만 이들에게도 나름 로맨틱한 겨울나기가 있지 않을까요? 남자에 구애하지 않고 자족하며 사는 건여물녀들의 겨울나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싱글인 내가 "정말 멋진 겨울을 보냈어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멋진 남자를 하나 장만해서, 둘이서 <겨울연가>처럼 눈사람도 만들고, <천국의 계단>처럼 스케이트장도 가고, <파리의 연인>처럼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서 와인이라도 마시고, <아이리스>처럼 일본의 온천장으로 놀러가 사탕키스라도 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을까? 물론 이때 함께하는 남자는 당연히 배용준이나 권상우, 아니면 이병헌처럼 생겨야 분위기가 살겠지만 말이다.

혹시나 이런 비스무레한 겨울 한 번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산 지도 10년. 원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그냥 나를 가만히 두었다. 내 인생에서 싱글이 아니었던 시간은 탈탈 털어서 합쳐도 1년이 될까 말까이기 때문에, 나는 혼자 노는 방법에 관한 한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혼자서 밥도 잘 먹고, 박물관도 잘 가고, 여행도 잘 가고, 영화도 잘 보고, 공연도 잘 본다. 이 중 겨울용으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혼자 가는 겨울 여행'이다. 외국으로 갈 수도 있고, 국내로 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물 건너 가는 여행'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싱글인생 10년, 나를 키운 건 여행

압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생각이 깊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이렇게 과감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서 만난 압둘 압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생각이 깊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이렇게 과감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 김태희

관련사진보기


어떤 사람은 그런다. 혼자 여행가기 두렵지 않느냐고. 특히 외국에 나갈 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이기도 한다. 첫째는 영어, 둘째는 치안.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가 아니면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가 정말 많다는 것을.

인도는 영어를 쓰는 나라로 분류가 되고, 갔다 온 사람들이 말하길, 길에서 만난 거지 아저씨도 영어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대체 그 사람이 인도의 어디로 여행을 갔다 온 것인지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왜냐면 인도의 숙소나 기차역 등 몇몇 주요 장소를 빼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영어를 하는 사람도 "털티, 빠스뽀뜨, 삐르스트" 라는 발음을 들려줘서, 인도는 비영어권 국가라고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은 "thirty, passport, first" 였다.

영어가 안 통하니 사람들과의 대화는 "아그라 포트, 투엔티 루피! OK?" 와 같은 단어 몇 개로 했는데도 그들은 다 알아듣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 주었다. 심지어 어떤 남자애는 인도에서 다 한국어로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인도인들은 다 알아들었고, 남자애는 필요한 것을 얻었다.

물론 인도나 이슬람권 남자들은 동아시아권 여자들이 신기해서인지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집적대기도 한다. 그러나 나한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진짜 신기해서, 혹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이므로 적당히 끊어주면 된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밤에 싸돌아다니지 않고,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면 혼자 하는 외국 여행도 그닥 위험할 건 없다.

겨울에 혼자 여행을 가면, 여행을 준비하며 설레기 때문에 지금이 12월이라는 사실도, 이 달이 지나가면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 살을 더 먹었지만, 여행 후의 즐거운 후유증으로 인해 새로 먹은 한 살을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떠날 수밖에.

여행지에서 만난 안식처, 종교를 갖다

아잔타에 있는 석가열반상
 아잔타에 있는 석가열반상
ⓒ 김태희

관련사진보기


겨울 여행은 어디든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정해 떠나면 최고의 선택이다. 2005년 1월, 인도로 떠나며 내가 잡은 주제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였다. 그래서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 부처님이 자라난 곳 카필라바스투,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처음 설법을 하신 사르나트 등을 찾아갔다.

가는 이가 적어 교통도 불편하고 가기도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여행은 어찌보면 인생과 비슷하다. 기다리고, 이동하고, 줄을 서는 등 지루하고 재미없는 순간이 많다. 하지만, 그 지루한 과정 중간 중간 만나는 재미있는 경험 하나 하나 때문에 여행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어떤 이는 인도의 매력에 푹 빠져서 가고 또 간다. 어떤 이는 너무 힘들었다며 다시는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바가지를 쓰지 않기 위해 릭샤 운전수, 숙박업소 주인, 길거리 노점상들과 매일 싸구려 흥정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필요한 물건도 사기 싫어진다.

가난에 지친 힘든 이들이 내미는 손길을 그냥 지나가다 보면 세상의 불평등과 빈부격차에 대해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아잔타 석굴에서 부처 열반상을 보았다. 잠이 든 듯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드신 부처의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고, 금방 멈추질 않았다.

쉬라바스티는 불교 8대 성지 중 하나로 부처와 제자들이 머물렀던 '기원정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한국 절 '기원정사 천축선원'이 있었다. 어렵게 찾아간 이곳에서 지낸 이틀 동안 완벽한 한국 사찰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아늑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지치고 힘든 여행 중 만난 이곳은 평온한 극락과 같았고, 이곳을 떠날 때는 나도 불자가 되어 있었다.

혼자 가는 여행, 남자대신 더 많은 사람을

이와주쿠 박물관 앞에 전시된 매머드 코끼리뼈로 만든 집
 이와주쿠 박물관 앞에 전시된 매머드 코끼리뼈로 만든 집
ⓒ 김태희

관련사진보기


일본도 내게는 겨울로 기억되는 곳이다. 일본에 가서 온천도 가고, 쇼핑을 해도 좋겠지만, 난 가이드북에도 없는 이와주쿠(岩宿)로 갔다.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마현에 있는 이와주쿠를 어떻게 가야할지, 처음에는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데 유스호스텔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일본 여자 분이 아카기(赤城) 역에서 가깝다고 알려주셨다. 도쿄에서 아카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이와주쿠에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멀지 않다며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셨다. 일본어로 말했지만, 무료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료로 빌려준 자전거 하나에 그날 여행이 확 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역으로 돌아왔지만, 자전거 하나 때문에 그저 기분이 좋았고, 이와주쿠 구석기 박물관에서 본 유물들도 너무너무 맘에 들었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 행복해지는 단순한 종족이었다.

남들은 사과 먹으러, 바다 보러 가는 아오모리를 나는 신석기 유적지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때문에 찾아갔다. 산나이마루야마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시대 유적지이다. 도쿄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아오모리에 내렸는데, 그동안 썼던 일기장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

고등학교 때 배운, 일본어 한 두 마디로 어찌어찌 버스 차고지 전화번호는 알아냈지만, 전화통화는 쉽지 않았다. 결국 아오모리 버스터미널 인포메이션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아냈고, 무사히 일기장을 찾아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재미있게 이야기할 거리를 만드느라 이런 쇼를 한 것이라고 위로하기로 했다.

유적지에서 자원봉사자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서로 아는 영어, 아는 일본어 단어를 총동원하여 유적지 설명을 들었다. 내 고장의 자랑스런 유적지 산나이마루야마를 위해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이셨다. 유적지를 다 둘러보자 차로 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아카기 역에서 자전거를 빌려준 친절한 역무원 언니, 산나이마루야마에서 열심히 설명을 해 주신 아저씨로 인해 나의 일본 오지(?) 여행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여행을 하면 항상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여행 가서 괜찮은 남자 하나 건져 오겠다는 쓸데없는 잡념만 가지지 않으면, 여행은 내게 멋진 사람들,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소개해 준다.

'장롱면허 탈출' 여행 프로젝트를 준비하다

지리산 어느 봉우리에 올라 찍은 사진
 지리산 어느 봉우리에 올라 찍은 사진
ⓒ 김태희

관련사진보기


유적지가 없으면 여행을 가야할 필요성도, 사진을 찍을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올 겨울은 뉴질랜드로 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캠퍼밴을 빌려서 떠나는 여행이다. 2003년 면허를 딴 이후로 지금까지 신분증으로만 쓰던 면허증을 국제운전면허증으로 바꾸어 한 번 써보게 생겼다. 영국, 일본, 인도처럼 이 나라의 운전석도 오른 쪽에 있고 차의 진행방향도 우리와 반대이지만, 동행 중에 운전을 하는 이가 있으니 배우며 해 볼 생각이다.

예전에는 유적지만 있으면 경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유적지는 기본으로 있고, 거기에 경치까지 어우러진 곳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많은 유적지를 답사하다 보니 멋진 풍경 속에 유적지가 놓여있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그러면서 내 눈에 점차 풍경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게 경치의 아름다움을 처음 알려준 곳은 부석사였다. 부석사 무량수전 바로 옆에 있는 3층 석탑에서 앞을 바라보면 먹물빛 산자락들이 겹겹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풍경을 처음 보고 왜 동양의 산수화가 산을 먹물빛으로 그리는지 뼈저리게 이해했고,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숨막히게 실감을 했다.

그 후 지리산 종주를 가서 내가 예전에 부석사에서 본 겹겹이 쌓인 산자락이 봉우리 하나 올라갈 때마다 360도로 펼쳐진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지리산은 내 가슴 속에 품은 산이 되었고, 그 풍경을 보며 내가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여행에도 이런 경험을 기대한다.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작년까지도 나는 여전히 어리다고 생각했다. 어른으로서의 책임, 세상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한 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올해를 터닝 포인트로 어른으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이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여행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성인이 되어 내년을 맞이할 계기 말이다.


태그:#여행, #인도, #모로코, #일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