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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항상 순도 100%의 슬픔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비극의 바다 속에는 물에 용해된 몇 방울의 산소 같은 그 비극을 극복할 희망이 녹아 있기 마련입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다른 축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간의 이념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은 '냉전'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열전(熱戰)의 비극을 한반도가 떠안아야 했습니다. 동서 대립의 첨예한 균형의 천칭(天秤)에서 한반도는 저울의 가로장 양쪽 끝에 저울판을 수평으로 감당해야 하는 정중앙의 줏대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은 그 균형에 위협을 느낀 양진영 패싸움의 현장이었습니다.

이 패싸움을 통해 일본과 미국 등 주변국들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현장인 한반도는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몽땅 불에 타서 검게 변한 것은 우리의 땅과 집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애끊는 슬픔은 종전 5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채 평생을 그리움으로만 지낸 부부와 형제가 상봉치 못하고 이승에서의 삶을 속속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 슬픔이 우리만의 것도 아님을 세계 곳곳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뉴욕 맨해튼 남단의 배터리 파크(Battery Park)는 클린턴 성 국립천연기념물(Castle Clinton National Monument)이 있는 사적지이기도 하지만 주로 엘리스 섬(Ellis Island)과 리버티 섬(Liberty Island)으로 가는 페리를 타는 곳이어서 여행객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르는 곳입니다. 월가의 고층빌딩들을 등지고 허드슨 강(Hudson River)을 바라보는 부두A(Pier A)의 풍광만으로도 여행객들을 실망시키지는 않는 곳이지요. 이곳의 한 켠에 한국동란 참전비가 있습니다. 바닥에 새겨진 참전 국가별 통계가 새삼스럽게 참혹한 과거를 들춥니다.

'사망 미국 54,246명, 부상 미국 103,248명, 실종 미국 8,377명'

점점 더 슈퍼파워 국가로서의 전횡을 일삼는 미국 위정자들의 행실이 곱지는 않지만 한국동란에서 피를 흘린 이 미국의 젊은이들 앞에서 넋을 잃게 됩니다. 1950년대 초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했을 한반도에서 그들은 이렇게 목숨을 잃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인근에도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비가 있습니다. 저는 그 기념비에 새겨져서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문구 '자유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이런 달콤한 어휘로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는 '피 흘림'의 죄책을 면피하고 있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링컨기념관 인근의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비
 워싱턴 링컨기념관 인근의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비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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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 주 남동부에 근육 좋은 사나이가 힘주어 오른 팔뚝을 구부린 듯한 L자형 반도, 케이프코드(Cape Cod)가 있습니다. 주변 바다에 캐나다의 래브라도 한류가 이곳까지 미쳐서 대구(cod)가 풍어를 이루곤 했기 때문에 '대구 곶'이란 지명을 얻었지만 지금 대구잡이는 그저 영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전설 같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요.

케이프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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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이 곶의 주먹쯤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은 1620년 11월 21일 범선 메이플라워호가 67일간의 항해 끝에 처음 닻을 내린 곳입니다. 성난 폭풍에 떠밀려 원래의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와는 전혀 다른 곳에 상륙하게 된 것이지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는 최종 정착지였던 플리머스(Plymouth)로 가기 전에 이곳에서 메이플라워호 맹약(Mayflower Compact)에 서명하고 자유와 평등의 신세계 건설을 다짐했습니다. 필그림 모뉴먼트는 뉴잉글랜드 개척의 시발이 된 필그림 파더스의 상륙을 기념해서 1910년에 77m 높이로 완공한 것입니다.

프로빈스타운의 필그림 모뉴먼트
 프로빈스타운의 필그림 모뉴먼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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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필그림 모뉴먼트 옆 길가의 작은 추모비가 눈에 띄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문을 읽었지요.

"1931년 11월 6일생. 1950년 10월 13일 한국전에서 전사"

프로빈스타운의 마누엘 추모비
 프로빈스타운의 마누엘 추모비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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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19살 생일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고향의 지구 반대편 낯선 산하에서 짧은 생을 마친 것입니다. 그 아래의 제가 묵은 호스텔 앞 넓은 운동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Manuel V. Motta Athletic Field'로 이름 붙여 놓았습니다. 추모비 길 건너편의 초등학교 이름은 'Veterans Memorial Elementary School'이고, 도심 상공회의소 옆 전몰장병 기념비에도 2차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이곳 출신의 참전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발견하는 일은 늘 가슴이 미어지는 일입니다.

상공회의소 옆의 전몰장병 기념비
 상공회의소 옆의 전몰장병 기념비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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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 11월 늦가을 하루, 민통선과 DMZ의 남방한계선을 걷는 '남북평화통일염원 PLZ(평화·생명지대)트레킹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간 금단의 영역으로 접근조차 불가능했던 지역을 걸으면서 평화와 생명의 의미를 되새겼지요.

오른쪽위의 언덕에서 한국군 초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통선을 걷고 있는 트레킹 참가자들
 오른쪽위의 언덕에서 한국군 초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통선을 걷고 있는 트레킹 참가자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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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트레킹 코스 중의 하나였던 '승전OP'에 올랐습니다. 철책선 너머 남쪽으로 포구를 겨눈 북한의 초소들이 지척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승전OP의 옥상에 놓인 몇 점의 전쟁유물에서 케이프코드 프로빈스타운의 19살 젊은 마누엘이 어떻게 이곳에서 순교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중에 DMZ에서 회수한 전쟁유물중에서 탄환이 관통한 흔적이 촘촘한 녹슨 철모가 유독 저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마누엘과 또 다른 젊은 병사가 총탄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썼을 철모일 것입니다.

승전OP의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중에 DMZ에서 발견된 총알이 관통한 철모
 승전OP의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중에 DMZ에서 발견된 총알이 관통한 철모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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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로 상징될 참전 군인들은 차가운 쇠붙이에 머리를 관통당하고 이렇게 한국의 산하에 생명을 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로빈스타운의 마누엘 부모형제들은 여전히 아물지 않는 단장의 슬픔으로 그 작고 초라한 비문 앞에 매년 꽃을 바칠 것입니다.

프로빈스타운의 마누엘 추모비
 프로빈스타운의 마누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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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과 그의 친구들이 피를 뿌렸던 DMZ는 종전 후 56년 동안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사람의 접근이 불가했고, 단지 전쟁을 기억할 수 없는 동식물들만 왕래하는 생태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민통선안의 가을
 민통선안의 가을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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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발길이 닿지않은 민통선안과 DMZ는 생태의 보고 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은 민통선안과 DMZ는 생태의 보고 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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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의가 아니게 보존된 DMZ의 생태는 비극의 바닷물에 용해된 몇 방울의 산소 같은 것입니다. 이 한국전쟁의 비극을 순도 100%의 비극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섬기듯 보호되어야 할 곳입니다.

올해에도 이곳에 접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DMZ다큐멘터리 영화제 및 다문화가정과  함께하는 제2회 DMZ 트레킹 대회'입니다.

민통선 안의 인삼밭
 민통선 안의 인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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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는 피의 대가로 얻은 생태의 보고입니다.
 DMZ는 피의 대가로 얻은 생태의 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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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볕 좋은 가을날, 평소에는 넘볼 수도 없는 그 곳을 걸으면서 이 피의 순교와 단장의 슬픔을 참으면서 얻은 DMZ를 향후 우리가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내야 할지를 고민해볼 일입니다. 그리고 과연 평화는 전쟁의 기억 위에서만 필 수 있는 꽃인가를 반추해 볼 일입니다.

워싱턴의 9.11테러 전시장에서
 워싱턴의 9.11테러 전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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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제2회 DMZ 트레킹 대회 | www.ilovedmz.co.kr
-DMZ다큐멘터리 영화제 | www.dmzdocs.com
-제1회 DMZ 트레킹 대회 | http://blog.naver.com/motif_1/30037783273

DMZ다큐멘터리 영화제 및 다문화가정과 함께 하는
제2회 DMZ 트레킹 대회

●행사일시 | 2008년 10월 24일(토요일) 10:00~16:00
●행사장소 | 남방한계선 및 민통선 내(파주/연천)
●주    최 | 사단법인 대한레저스포츠협의회
●주    관 | 경기공연영상위원회/DMZ 트레킹대회조직위원회/파주문화관광협회
●참가대상 | 전 국민/ 다문화가정, 동호회, 학교, 청소년단체, 학계·체육·예술·문화계 단체 1,550명, 진행요원 200명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파주시, DMZ다큐멘터리영화제조직위원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접    수 | 인터넷 www.ilovedmz.co.kr 에서 접수
●참 가 비 | 성인 16,000원, 학생 12,000원
●참가자 지급품 | 중식 및 건빵 간식, 배번판, 코스지도, DMZ다큐멘터리 영화제 관람권
●문산역 및 대회장 주변 셔틀버스 운행
●트레킹코스 | 파평초등학교 - 리비교 -약수터 - 1.21무장공비침투로 - 승전OP -파평초등하교(왕복 15km)  

트레킹 코스
 트레킹 코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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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과 홈페이지 www.motif1.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DMZ,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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