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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다 담긴 듯한 가을입니다.

황금들판
 황금들판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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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 기억속의 가을에는 농부의 고된 노역이 담겨있습니다. 벼를 베고 말리고 뒤집고 타작해야하는 날들에 잠시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가을입니다.

여름에는 김을 매고 점심을 먹고 나면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마을의 품 너른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깐의 오수라도 즐길 여유가 있습니다. 가을은 그런 짬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벼 베는 것이 늦어지면 서리 맞은 벼이삭이 떨어져 소출이 줄어듭니다.

가을은 농부의 고된 노역을 필요로 합니다.
 가을은 농부의 고된 노역을 필요로 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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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들깨와 참깨를 제때에 베어 털지 않으면 익어 벌어진 씨방에서 깨들은 밭으로 흩어집니다. 깨를 베는 일도, 그것을 말려 터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리깨질이아니라 깻단을 두드려 털어야하지요. 부스러기에서 알갱이를 골라내려면 수도 없이 키질을 해야 합니다.

두드려 털어야할 참깨 깻단
 두드려 털어야할 참깨 깻단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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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를 갈무리 하느라 콩이나 팥의 수확을 마냥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뒷그루로 지은 덩굴팥의 꼬투리는 말라서 스스로 몸을 뒤틀며 종자들을 허공으로 날리기 때문입니다. 들과 밭은 온통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콩을 거두는 농부
 콩을 거두는 농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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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느른하다고 밤에도 일찍 베개를 친구 삼을 수는 없습니다. 들일 짬짬이 따둔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야합니다. 고단하다고 이 일을 미루면 모두 홍시가 되어 조상님의 제상에 무엇을 올리겠습니까. 감을 깎아야 감 껍질을 말려서 긴긴 겨울 냠냠한 입을 달랠 수 있는 감말랭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감을 따서 껍질을 깎는 일은 보통 밤에 이루어지게 되지요.
 감을 따서 껍질을 깎는 일은 보통 밤에 이루어지게 되지요.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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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황없는 가을걷이가 어지간히 끝나면 갈무리한 것들을 대처에 나가있는 살붙이들에게 갈라내기 바쁩니다.

기와집 문간에서 콩을 까고 계신 파주 만우리의 정순정 할머니가 이 소리 없는 소란으로 가득한 가을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17살에 18살짜리 같은 마을의 강석주 총각에게 시집오셔서 59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딸을 키워 대처로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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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정 할머님의 마당의 멍석 위에서 자연의 은총 같은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고 있는 것들을 통해 가을을 사는 농부의 부지런함을 봅니다.

정순정할머니의 마당
 정순정할머니의 마당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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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오가며 추상의 골을 만들어 놓은 우케와 붉은 팥과 카키색의 녹두, 가지와 대추가 농부가 맞은 가을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가을 볕을 받아 다글다글해진 우케는 햇밥이 되어 곧 상에 오를 것입니다. 붉은 팥은 동짓날 새알심을 품은 팥죽이 되어 잡살뱅이 귀신들을 막아 줄 것입니다. 맷돌을 돌아 나온 녹두는 녹두전병이 되어 막걸리의 친구가 되어 농부의 피로를 풀어주게 될 것이며 잘 말려진 찐 대추는 달달한 대추차가 되어 지난밤 과음한 위를 달래주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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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이즘 나중에 농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흔해졌습니다. 농부는 흙을 애인의 뺨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야하고, 사계절 혹은 몇 년을 기다리는 인내 후에 결실이 있을 수 있으며, 산과 들의 풀과 나무, 그 속의 미물조차도 품안의 자식처럼 아껴야하며 태풍과 서리, 폭설과 폭우에 순응하는 너른 속을 지닐 것이며 육신이 달토록 근로를 감내해야하는 땀을 사랑할 것이며, 해 뜨기 전에 잠자리를 박찰 근면과 해진 뒤에도 들을 지킬 용기가 있어야함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선크림으로 피부를 무장하고 햇볕으로 나설 짬은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을 아는지, 그래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등과 기미와 주근깨가 은하수보다도 더 촘촘하게 박힌 얼굴을 훈장으로 여겨야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농부는 한 마리 모기의 윙윙거림도 참을 수 없는 대처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낭만이 아님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 기미와 주근깨가 두려워서는 농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 기미와 주근깨가 두려워서는 농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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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어울린다고 농부일 수는 없습니다. 농부에게 밀짚모자는 패션이 아니니까요. 제발 자연의 모든 현상을 달게 받아본 적이 없다면 인간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농부를 허투루 꿈꾸지 말 것입니다.

농부, 그는 예술가보다 더욱 농도 짙은 창조자입니다.
 농부, 그는 예술가보다 더욱 농도 짙은 창조자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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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과 홈페이지 www.motif1.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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