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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첩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건 1993년부터였다. 우연히 어느 인쇄소에서 <고려사절요>라는 책이 발견되면서 연기대첩에 대한 조사 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2000년 4월 15일 지금의 고복저수지에 연기대첩비가 만들어지게 됐다.
 
▲ 연기대첩비가 지난 2000년 고복저수지 공원에 세워졌다
 ▲ 연기대첩비가 지난 2000년 고복저수지 공원에 세워졌다
ⓒ 장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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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첩에 대한 문헌은 <고려사>의 세가편이나 열전에 나오고 <고려사절요>에 단편적으로 나와 있다.

연기대첩이 연기군 서면 쌍전리 정좌산을 중심으로 주변에 널려져 있는 전투와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도 내려져 오고 있지만 학술적으로 정리된 건 1994년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나온 <연기대첩연구>라는 책자가 처음이다.

연기대첩이란 말을 가지고 논란이 많았다. 연기승첩이라고도 불려지며, 학계나 역사학계에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합단적이 진을 쳤던 정좌산이 뜰 가운데 보인다. 옆이 창고개.
 합단적이 진을 쳤던 정좌산이 뜰 가운데 보인다. 옆이 창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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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향토박물관장 임영수씨는 "처음에 공주대에서 연기승첩이라고 주장하다가 세종실록지리지에 세종이 연기대첩이라고 언급했다고 문헌을 대자 대첩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원나라에 반란을 해 고려로 침입한 합단적이지만 고려에 흉폭한 짓을 하며 수탈을 해 고려군이 물리친 전투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합단적의 침입은 몽고족들의 침입의 연장선으로 볼때 고려 전체의 전화를 모면하게된 게 연기대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기대첩이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던 건 합단적이 중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반란군이며, 전투에서 원나라의 원군이 도움을 줬다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임영수 관장은 "합단적 10만 대군이 쳐들어와  전국적인 고려군사 3만명이 동원돼 싸운 전투"라며 "이곳 일대에 13만명이라는 군사들이 벌인 전투라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고 말했다.

아직도 이곳 마을에서는 정좌산, 창고개, 작은창고개, 군량골, 전당골 등 많은 지명들이 그때 당시의 전투를 상상케 하는 지명들이 불려지고 있다.

군량길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다. 군량을 쌓아 두었던 곳이라 전해짐.
 군량길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다. 군량을 쌓아 두었던 곳이라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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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창고개.전당골 동남쪽. 마을 상고시대에 창고가 있던 곳, 마을 앞의 뜰은 창뜰.
 작은 창고개.전당골 동남쪽. 마을 상고시대에 창고가 있던 곳, 마을 앞의 뜰은 창뜰.
ⓒ 장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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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산에 합단적이 머물게 된 이유를 고인이 되신 김재붕(향토사학자) 선생은 "금강을 건너 공주를 거쳐 전주로 갈 건지, 금강을 건너 유성을 거쳐 경상 우도쪽으로 진격할 것인지, 미호천을 건너 상주를 지나 경상좌도로 갈 것인지 진로 모색하는 시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정좌산은 대량의 군사를 이끌고 군량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창고개, 군량골 등 지금 그쪽 지명들이 내려오듯 그곳은 들판이 널려있고 뜰이 넓어 식량확보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속국이었던 고려에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이 쳐들어와 원주와 충주를 거쳐 연기지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합단적은 지금의 쌍전리 정자산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 원의 연합군은 앞 월하천을 앞두고 대박산에 진을 친다.

그 때는 북방에서 몽고족한테 11차례나 되는 공격을 받고 삼별초가 제주도와 진도를 거점으로 겨우 항쟁하는 시기였다.

승적골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성제리. 그곳에 연기대첩비 현수막이 걸려있다
 승적골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성제리. 그곳에 연기대첩비 현수막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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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291년 초하룻날 합단적이 연기현에 주둔하거늘 설도간 대군과 무리 삼군이 한밤(야반)에 목주(목천)을 출발해서 먼동(여명)이 틀 무렵에 연기 정좌산 밑에 이르러서 적진에 핍박하여 나가서 불의에 포위하니 적이 크게 놀라서 산으로 올라가 험준함을 뒤로 하고 싸우고져 하거늘 우리 삼군보졸이 앞에 있고 기병이 뒤를 쫒아서 적의 복심과 배후가 제어를 받아서 다말을 버리고 숲 사이에 숨어서 우리 전봉중 두 사람을 사격한다.

우리 군졸이 두려워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거늘 김흔이 꾸짖고 또 명령하여 가로되 감히 후퇴하는 자는 참하겠다 하니 이에 보졸오백이 먼저 앞서기를 다투어 올라가서 죽기로 싸운다.

졸병 이석과 전득현 등이 앞으로 돌진하여 적의 선봉 장사 두놈을 참하고 이 김을 타서 크게 외치며 대군이 합세하여 공격하니 적의 새력이 궁지에 몰려서 달아나며 무너져버린다.추격하여 공주 하천에 이르니 어푸러진 사체가 삼십여리에 뻗치고 물에 빠져 죽은 놈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의 날랜 기병 천여명이 하수를 건너 도망을 친다.

그러나 연기대첩은 원나라의 속국이라는 상태에서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적을 원과 고려군의 연합군이 무찌른 전투라 과연 자주적인 전투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분명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291년 원의 군대와 함께 합단군을 연기에서 격파했다고 나와 있다.

쌍전리 전 마을이장 이명원씨는 "정좌산이란 월하리와 쌍전리에 붙어있는 산으로 해발 100미터 정도의 작은 산"이라고 말하고 "원래 이곳은 '쌍괴리'라고 마을 부락에 1000년된 느티나무가 두그루 있었어 느티나무  槐자의 쌍괴리"라고 주장했다.

*제9회 연기대첩제가 10월 20일(화) 오전 11시 고복저수지 연기대첩공원에서 열린다.


태그:#연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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