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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이 언덕 아래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 누렁이들 소들이 언덕 아래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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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나자 초록빛을 띠던 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집에 있어도 눈앞에 귤이 어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귤이 채 익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그 맛이 궁금하여 발길은 자연스레 과원을 향하게 된다. 귤을 재배하는 농민에게 가을은 노란 귤빛을 띠고 다가온다.

일 년을 주기로 보면 나무를 가꾸는 일은 지금 거의 끝나갈 시기다. 이제 열매를 온전히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수확 전에 할 일이 있다면 상품성이 떨어지는 열매를 제거하는 일, 열매를 너무 많이 맺은 가지에서 열매를 일부 솎아주는 일, 바람에 가지가 꺾어지지 않도록 나무를 받쳐주는 일 등이다.

귤이 익어가고 있다. 농부에게 가을은 노란 귤빛으로 다가온다.
▲ 귤나무 귤이 익어가고 있다. 농부에게 가을은 노란 귤빛으로 다가온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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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 농사다. 하늘을 향해서 귤이 맛있게 익어갈 수 있도록 가을햇살을 듬뿍 쏟아부어주길 기원하는 것도 농부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통과의례다.

따사로운 가을햇살을 맞으며 그제도 보고 어제도 봤던 귤나무들을 둘러봤다. 바람을 막기 위해 과원 둘레에 심어놓은 삼나무 방풍림이 가지를 너무 많이 내서 귤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톱을 들고 삼나무 가지 치는 일을 몇 시간 하고나니 팔뚝이 아파 잠시 쉬려고  그늘에 앉았는데, 주변에서 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원의 한쪽 모퉁이가 위미2리 마을공동목장과 경계를 마주대하고 있는데, 그 모퉁이에 목장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개구멍이 있다. 봄철에 아내가 일을 하는 중간에 짬을 내 고사리를 캐러 목장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연못에서 물을 마시던 소 한 마리가 급히 자리를 옮기고 있다.
▲ 부레옥잠 꽃이 반발한 연못 연못에서 물을 마시던 소 한 마리가 급히 자리를 옮기고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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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멍을 지나 소우는 소리를 좇아 목장으로 향했다. 부레옥잠이 옅은 보랏빛 꽃을 가득 피운 연못에서 소 한 마리가 갈증을 달래기 위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놀랐는지 자리를 피했다.

목장 입구를 지나면 나지막한 언덕이 나오는데, 그 언덕 아래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언덕이 소들에게 풀을 제공한다면 언덕 뒤에 있는 한라산은 바람을 막아준다. 평화, 이보다 더 평화로운 장면이 있을까? 평화는 하늘이 이 가을에 대자연에 내린 축복이다. 

억새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산들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억새 억새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산들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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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다른 마을에서는 마을 목장을 외지인들에게 매각해서 가구별로 돈을 나누기도 했고, 또 그 과정에서 파열음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위미2리는 20만평이 넘는 마을목장을 여전히 잘 간직해오고 있다. 바깥세상엔 중장비 굉음이 진동하는 시대에도 이곳 목장에 여지껏 평화가 머물러 있는 것도 내겐 여간한 축복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에 취해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억새를 보니 모두 흔들리고 있다. 비로소 산들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람을 타고 자신의 종족을 더 멀리 넓게 퍼트리려는 억새의 분투도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지면 한없이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렇듯 자연은 각자가 생존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는 가운데서 조화롭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이치를 허락했다.

잠시 일행을 잃어버린 소 한마리가 놀란 눈으로 필자를 바라봤다.
▲ 소 잠시 일행을 잃어버린 소 한마리가 놀란 눈으로 필자를 바라봤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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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오르니 수풀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에 놀란 소 한 마리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마도 올라올 때 봤던 그놈들과 일행인데 혼자 풀을 뜯다보니 일행과 헤어지게 된 모양이다. 소는 나를 보고 놀라고 난 소를 보고 놀랐다. 자기가 판단할 때 충분히 안전한 지점에 이르니 소는 큰 눈을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언덕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한없이 잔잔했다. 그 잔잔한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납작한 섬이 지귀도(地歸島)다. 정축년(1937년) 스물세 살 청년 서정주는 "태양이 더 뜨겁게 이글거리는 곳을 찾아" 저 섬에 들어갔다고 했다. 며칠 전 저 섬을 찾아가 미당의 채취를 느껴보려고 했지만, 섬을 드나드는 마을 어촌계의 배가 수리를 위해 조선소에 들어갔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눈으로 보면서도 아직까지 발 한번 내딛지 못한 탓에 섬은 내게 여전히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늘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닿을 수 없기에 여전히 내게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 지귀도 늘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닿을 수 없기에 여전히 내게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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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언덕위에 소들의 입이 닿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 있다. 대개가 돌무더기 위에 찔레넝쿨과 청미래넝굴이 무성하게 자라는 곳이다. 이 가시 돋은 식물들과 더불어 고사리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 키 작은 수풀을 이뤘는데, 그 수풀 속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 작은 수풀에 가을을 알리는 전령은 찔레열매다. 하얀 꽃을 만발하게 피웠던 여름의 영화를 뒤로하고 줄기에서 초록의 물기가 빠져나가면, 줄기 끝에 빨간 열매를 남긴다. 마치 불구덩이에 내던져져 재만 남기고 산화해간 노승의 시신이 사리를 남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록이 대지와 작별을 고하는 가을, 빨간 열매는 찔레의 화려했던 시절을 증언하며 겨울을 기다린다.

찔레는 여름의 영화를 뒤로하고 메마른 줄기에 빨간 열매만 남겼다.
▲ 찔레열매 찔레는 여름의 영화를 뒤로하고 메마른 줄기에 빨간 열매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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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미래덩굴도 빨간 열매를 남겼다. 가울이 익어가자 줄기는 둥글고 푸르렀던 잎을 대부분 떨어뜨렸다.
▲ 청미래덩굴 열매 청미래덩굴도 빨간 열매를 남겼다. 가울이 익어가자 줄기는 둥글고 푸르렀던 잎을 대부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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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열매 곁에서 청미래덩굴도 빨간 열매를 남겼다. 청미래덩굴은 잎이 넓고 둥글기 때문에 후덕해 보이지만 찔레처럼 마디 중간에 가시가 있다. 만만히 봤다가는 가시에 찔리기 일쑤다. 가을에 잎을 떨어뜨릴 때쯤 되면 여름에 연녹색을 띠던 열매들이 빨갛게 남아 앙상한 가지를 지킨다.

빨간 건 이들만이 아니다. 제주의 들녘 어디에나 자라는 산달나무 열매 또한 빨갛기 그지없다. 제주4.3 유족들로부터 산달나무 한 구루를 선물 받고 "봄에 꽃이 하얗게 피면 다시 보자"고 했다가, 꽃이 피기 직전에 벼랑에 몸을 던진 가련한 전직 대통령을 생각하니 빨간 열매가 서럽기 그지없다. 살아생전에 봉하마을 집 마당에 이 열매가 빨갛게 맺히는 걸 한 번만이라도 보고 갔으면 덜 야속했을 것을.

산달나무 가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 산달나무 열매 산달나무 가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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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인근 밭에 토종감이 익어가고 있다.
▲ 토종감 목장 인근 밭에 토종감이 익어가고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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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인근 밭에서 자라는 토종감도 작은 열매를 맺었다. 메추리 알 만큼 작은 토종감의 빨간 자태가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정겹기 그지없다. 감나무 가까이 이르니 주변에서 장끼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있다. 저놈도 이 감이 탐나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일을 하다말고 어디로 사라졌냐고 찾은 게다. 도원의 가을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개구멍을 타고 속세로 가야할 시간이다. 그곳에 또 다른 가을이 노랗게 나을 기다리고 있다.


태그:#가을, #위미2리마을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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