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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손을 잡고 맨발로 골짜기 길을 걷는 예쁘고 귀여운 아기
 엄마 손을 잡고 맨발로 골짜기 길을 걷는 예쁘고 귀여운 아기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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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길이 참 부드럽고 곱네요, 어? 저기 아가 좀 보세요?"
주차장에 세운 버스에서 내려 골짜기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금강교를 건넌 일행들이 고운 모래가 매끈하게 깔린 길을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예쁘고 귀엽게 생긴 아기였다. 겨우 첫돌이 지났을 것 같은 아기가 엄마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들이 놀란 것은 아기와 엄마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함께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국의 많은 유원지와 산을 찾아 다녔지만 이곳 강천산 골짜기처럼 길이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은 볼 수 없었다. 길이 어디 한 곳 훼손된 곳이 없고, 곱고 하얀 모래가 깔린 길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그래서 아직 어리고 여린 첫돌배기 아기도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이리라.

등산로 입구에서 만난 골짜기 길을 맨발로 걷는 아기와 엄마

산행은 곧바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경사가 상당히 급하다. 등산로가 대부분 흙길이었지만 급한 오르막길이어서 금방 이마에 땅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서 땀을 식혀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오르자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능선에서 바라보이는 주변은 온통 산줄기가 이어져 깊은 산골을 실감나게 한다. 첫 번째 봉우리인 깃대봉에 오르자 조망은 더욱 넓고 시원했다.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강천산 연봉들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강천산 연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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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고운 담양호와 호수 건너 추월산
 물빛 고운 담양호와 호수 건너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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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부터는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걷는 길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능선에서는 오른편 골짜기로 호수가 내려다보이고 호수 건너 우뚝 솟은 봉우리도 바라보인다.

"저 아래 호수가 담양호입니다. 호수 건너편에 솟아 있는 산이 추월산이구요."
우리들을 안내하는 후미그룹 산악대장이 설명을 해준다. 앞서 올라간 사람들은 어느새 바람처럼 사라지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쳐진 등산객들 일곱 명이 꽁무니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와! 드디어 정상이다. 이제 바로 내려가면 되나요? 별로 힘들 것 없는 산이네."
정상에 오르자 여성등산객 한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쾌재를 부른다. 후미 그룹 중에서도 가장 힘들어하던 여성이었다. 강천산 정상은 왕자봉이 주봉으로 해발 583미터였다.

이 산은 본래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이라 불렸다. 노령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이다. 광덕산(565m), 산성산(603m)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물론 곧장 내려가셔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산행은 이곳 정상을 거쳐 옛 산성이 있는 금성산과 광덕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는 코스로 되어 있습니다."

여성등산객은 금방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남은 산행이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에서 두 명의 여성등산객은 곧장 왼편 골짜기로 내려가고 다른 사람들은 올랐던 길을 조금 되돌아 내려가다가 금성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금성산까지는 30여분이 소요되었다.

정상에 오른 후미그룹 등산객들
 정상에 오른 후미그룹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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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 북문터
 금성산성 북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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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저 성벽 좀 보세요? 자연석으로 쌓은 멋진 성이네요?"
금성산에 오르자 첫 번째로 마주친 것이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이 성벽은 다른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 쌓은 모습이 아니라,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올렸는데 매우 정교하게 쌓은 모습이 특이했다.

그러나 위로 오르자 성벽의 모습도 달라졌다. 금성산성 북문터였다. 성터에 올라서자 주변 풍경이 시원하다. 성문이 있던 자리여서 제법 넓은 공터에 내려앉은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1409년에 개축하였다.

임진왜란 후 1610년(광해군 2년)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했는데 외성은 6486미터, 내성은 859미터로 돌로 쌓은 석성이다. 성안에는 곡식 1만6천 섬을 저장할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고, 객사와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건물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내가 강천산을 거쳐 이렇게 멋진 금성산성에 오르다니, 아! 나는 행복해!"
전에는 사이클 동호회 회원이었다가 사고로 크게 부상을 당한 후 등산을 시작했다는 여성이 탄성을 지른다. 그녀는 3년 전부터 이 강천산에 오르고 싶었는데 정말 감개무량하다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었다.

금성산성을 둘러보고 하산길로 나섰다. 광덕산까지 둘러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골짜기 한 쪽 귀퉁이를 가로막은 농사용 저수지 둑으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길이었다. 다행히 급한 내리막길에 기다란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클 동호회원이었던 여성등산객. 강천산에 올라 감동 먹다

그러나 경사가 너무 급하고 비좁은 사다리는 발판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어서 밑을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내려가는 길이 오금이 저린다. 더구나 고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일행 한 사람은 내리막길인데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급경사 하산길에서 만난 아슬아슬한 철제사다리
 급경사 하산길에서 만난 아슬아슬한 철제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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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물드는 호수 풍경
 단풍 물드는 호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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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급경사길을 내려서니 완만한 산길이다. 일행들은 산길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도토리 몇 개를 주워 들고 저수지 둑 위로 내려섰다. 저수지는 농어촌 공사가 농사용으로 막은 호수였다. 호수 면적은 좁은 편이었지만 호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단풍잎이 노랗고 빨간 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이 고운 물빛과 어우러져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호수는 만수위가 아니라 물이 밑으로 많이 내려간 모습이 가을동안 이 지역에 가뭄이 심했던가 보았다. 호수 둑에서 바라보는 맞은 편 절벽이 웅장하고 멋지다. 강천산 골짜기의 명물 '구장군폭포'가 있는 봉우리였다.

둑을 내려서자 길가에 서있는 몇 그루 누리장나무들이 아직도 빨간 꽃술 속에서 까만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이 신비롭다. 길가 절벽 밑에는 300미터 암반에서 뽑아 올린 물이라는 약수가 졸졸졸 흘러내린다. 약수 한 모금 마시고 골짜기 길로 나섰다.

"어머머! 이게 뭐야? 산골짜기에 웬 망측한 것들이 이렇게 많아?"
앞서 내려간 여성이 기겁을 한다. 다가가보니 바윗돌을 새겨 세운 조각 작품들이다. 그런데 모양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부분 남녀의 성기를 강조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안내문이 있네요. 이곳이 강천산 성 테마공원인데요"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이곳에 이런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었네요"

안내문에는 이곳 구장군 폭포 절벽이 자연풍화작용으로 남성기와 여성기를 닮은 모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하여 이곳에 조금은 해학적인 성 테마공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구장군 폭포 아래와 성 테마공원은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의 좋은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공원에는 정자 하나와 화장실도 갖춰져 있었다. 공원을 지나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예의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금모래길이었다.

구장군 폭포
 구장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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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건너 삼인대
 개울 건너 삼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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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선지 골짜기를 걷는 사람들 중에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골짜기 길 양편에는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화려한 단풍터널이 기대되는 모습이었다. 골짜기 개울물속에는 어른 팔뚝만큼씩 커다란 숭어 떼들이 유유히 몰려다니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렇게 한 참 내려오자 강천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을 지나자 길가 오른편 개울 건너에 작은 비각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삼인대'였다. 삼인대는 전북 유형문화재 27호로 조선 시대 중종 때 폐위된 신수근의 딸 폐비 신씨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이었다.

강천사와 삼인대,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풍경 키질하는 보살아주머니

1506년 폭군 연산을 몰아낸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 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한다. 그들은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 소식이 이곳에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의견을 모은다.

김정, 박상, 유옥 등 세 사람은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삼인대를 지나자 왼편에 크지 않은 사찰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강천사였다. 강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로 서기 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다섯개의 암자 중 하나였던 왕주암은 후삼국 시대 고려태조 왕건이 유숙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천사 요사채 앞에서 키질하는 보살 아주머니
 강천사 요사채 앞에서 키질하는 보살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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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창한 강천사는 현재 대웅전과 보광전, 관음전, 요사채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른 요사채 앞에서는 아주머니 보살 한 분이 추수한 곡식 갈무리라도 하는지 익숙한 솜씨로 키질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즘은 농촌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 키질하는 모습인데 강천사에서 보게 되다니, 오늘은 이래저래 횡재한 기분이네요"

함께 걷던 일행이 키질하던 보살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신기하고 정다웠던지 뒤돌아보며 하는 말이었다. 깊어가는 가을에 찾은 강천산 등산길과 하산길에서 만난, 맨발로 걷던 아기와 키질하던 아주머니의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정겨운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강천산, #금성산성, #이승철, #맨발 아기, #금모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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